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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십장(九遷十葬)
직역하면 아홉번 옮겨 열번째 장사지낸다는 뜻으로 조상의 무덤을 쓸 때 지나치게 욕심에 어두운 경우를 일컫는 구천십장(九遷十葬)은 대동기문(大東奇聞)에서 볼 수 있다.
조선 중기에 경북 울진 출신으로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는 풍수, 천문, 점술, 관상에 능통했는데 그가 우주의 오묘한 비법을 터득하게 된 일화가 있다.
젊은 시절, 울진 불영사(佛影寺)로 가던 길에 바랑을 메고 서 있는 어떤 중을 만났는데 그 중이 남사고가 탄 말에다 자신의 바랑을 실어줄 것을 부탁하자 남사고가 이를 허락했다.
남사고와 중이 함께 불영사에 도착해서 부용봉에 노닐다가 소나무 아래에서 내기장기를 두는데 중이 갑자기 기합소리와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가 한참 뒤에야 땅으로부터 코끝이 보이더니 점차 온몸을 나타냈다.
중이 묻기를 ‘무섭지 않더냐?’하니 남사고는 ‘무서울 것이 뭐 있겠소?’라고 대답했다.
중은 ‘내가 많은 사람에게 시험을 해 보았으나 모두 겁을 먹고 기절을 했으나 그대만은 이토록 대담하고 침착하니 내 비로소 가르칠 사람을 구했다’하고는 비법을 적은 책을 주며 ‘그대는 기골이 범상치 않으니 부디 힘쓰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이때부터 남사고는 비법이 적힌 책을 열심히 연구해 우주의 오묘한 이치를 꿰뚫어 알 수있게 됐다고 한다.
남사고는 명종의 뒤를 이은 선조의 등극을 점쳤고 임진왜란이 발발할 것도 미리 알고 있었으며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당쟁이 시작될 것도 예언했다.
하지만 설화 속에 나타나는 남사고의 이미지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는데 한 번은 부모의 장례를 위해 여기저기 길하다는 땅을 골라 장사지냈으나 장례를 치른 뒤에 부모님의 묘소를 딱 보니 자신의 마음에 도무지 차지 않았다.
그래서 길지(吉地)를 골라 여러 번 무덤을 옮기다가 마침내 한 묘 터를 얻었는데 바로 날으는 용이 하늘에 오르는 비룡상천(飛龍上天) 형세였다.
남사고는 크게 기뻐하며 이곳에 이장(移葬)을 하고 흙을 져다 봉분을 만드는데 어디선가 한 일꾼이 이런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아홉번 옮겨 열번째 장사지낸(九遷十葬) 남사고야 이 자리가 비룡상천하는 명당인 줄 알지 마라 죽은 뱀이 나무에 걸린(枯死掛樹) 자리가 여기가 아니더냐.
남사고가 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다시 산천의 형세를 찬찬히 살펴보니 과연 날으는 용이 하늘에 오르는 형세가 아니라 죽은 용의 형세였다.
정신을 차린 남사고는 그 노래를 부른 일꾼을 급히 찾았으나 일꾼은 홀연히 사라져 버려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에 남사고는 ‘땅도 각자 주인이 있는 법이니 인력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라며 탄식을 하고 해(害)나 없을 땅을 골라 이장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 고사에서 풍수지리에 아주 능통하면서도 정작 자기 아버지 무덤을 쓸 때에는 어떻게 하면 후손들이 발복(發福)을 누릴 수 있을까 하는 욕심에 눈이 어두워 아홉번 이장하고 열번 무덤을 쓰게 되는 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았다.
오늘의 한자
九 : 아홉 구, 遷 : 옮길 천, 十 : 열 십, 葬 : 장사지낼 장
편집국 편집장
2018-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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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득인(求仁得仁)
인을 구해 인을 얻음을 뜻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음을 말하는 구인득인(求仁得仁)은 사기(史記)에서 볼 수 있다.
은(殷)나라의 고죽군(孤竹君)은 세상을 떠나면서 왕위를 형인 백이(伯夷)보다도 지도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동생 숙제(叔齊)에게 물려준다고 했다.
그렇지만 숙제는 장남인 형이 왕위를 계승해야 된다며 사양했고 백이는 부왕의 유언을 따르는 것이 자식된 자의 도리라며 그대로 궁궐을 나왔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숙제 역시 그 나라를 떠났다.
그러던 어느 날 백이와 숙제는 약속이나 한 듯이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이 노인들을 공경하는 덕 있는 사람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를 섬기기 위해 찾아갔다.
그러나 이들 형제가 도착하기 전에 문왕은 죽고 아들 무왕(武王)이 그 뒤를 잇고 있었는데 무왕은 선왕의 유언에 따라 은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하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백이와 숙제는 무왕을 만류하며 ‘부왕의 장례도 아직 치르지 않았는데 무기를 들고 전쟁을 하는 것은 아들 된 자의 도리가 아니며 게다가 지금 토벌하려는 사람은 황제로 황제가 아무리 포학할지라도 모반을 하는 것은 신하된 자의 도리가 아니니 토벌을 멈추라고 말했다.
그러나 무왕은 자신의 계획을 포기할 수 없었으므로 군사의 출정(出征)을 명했다.
그러자 백이와 숙제는 그 앞을 가로 막았고 무왕은 노해 이들을 죽이려고 했는데 그때 마침 강태공(姜太公)이 나서 변호를 해 두 사람은 석방됐다.
무왕은 출정해 승리를 거두었고 천하를 통일해 호경에 도읍(都邑)을 세웠으며 백성들은 포학한 정치로부터 해방돼 기뻐했다.
그렇지만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행위를 비판하며 주나라 땅에서 나는 것은 그 무엇도 먹지 않겠다고 결심하고는 서우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살다가 굶어죽었다.
공자는 이들의 행동을 두고 ‘백이와 숙제는 자신들이 인을 구하려고 해 인을 얻었으니(求仁得仁) 무슨 원한이 있겠는가’하고 평가하고 있다.
오늘의 한자
求 : 구할 구, 仁 : 어질 인, 得 : 얻을 득, 仁 : 어질 인
편집국 편집장
2018-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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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우일모(九牛一毛)
아홉 마리의 소 가운데서 뽑은 한 개의 소 털이라는 뜻으로 많은 것 중에 가장 적은 것을 비유한 구우일모(九牛一毛)는 한서(漢書)의 보임안서(報任安書)와 문선(文選)의 사마천 보임소경서(司馬遷 保任少卿書)에서 볼 수 있다.
한(漢)나라 7대 황제인 무제(武帝) 때 5000명의 보병을 이끌고 흉노(匈奴)를 정벌하러 나갔던 이릉(李陵) 장군은 열 배가 넘는 적의 기병을 맞아 초전 10여 일간은 잘 싸웠으나 결국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듬해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는데 난전(亂戰)중에 전사한 줄 알았던 이릉이 흉노에게 투항해 후대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안 무제는 크게 노해 이릉의 일족(一族)을 참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중신을 비롯한 이릉의 동료들은 침묵 속에 무제의 안색만 살필 뿐 누구 하나 이릉을 위해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를 분개한 사마천(司馬遷)이 그를 변호하고 나섰다.
사마천은 지난날 흉노에게 경외(敬畏)의 대상이었던 이광(李廣) 장군의 손자인 이릉을 평소부터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국난(國難)에 임할 용장(勇將)이라고 굳게 믿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사가(史家)로서의 냉철한 눈으로 사태의 진상을 통찰하고 대담하게 무제에게 “황공하오나 이릉은 소수의 보병으로 오랑캐의 수만 기병과 싸워 그 괴수를 경악케 했으나 원군은 오지 않고 아군 속에 배반자까지 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패전한 것으로 생각되며 끝까지 병졸들과 신고(辛苦)를 같이한 이릉은 인간으로서 극한의 역량을 발휘한 명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며 그가 흉노에게 투항한 것도 필시 훗날 황은(皇恩)에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으로 사료되오니 차제에 폐하께서 이릉의 무공을 천하에 공표하시오소서”하고 아뢰었다.
무제는 진노해서 사마천을 투옥(投獄)한 후 궁형(宮刑)에 처했다.
세인(世人)은 이 일을 가리켜 이릉의 화(李陵之禍)라 일컫고 있는데 궁형이란 남성의 생식기를 잘라 없애는 것으로 가장 수치스런 형벌이었다.
사마천은 이를 친구인 임안(任安)에게 알리는 글(報任安書)에서 최하급의 치욕이라고 적고 이어 착잡한 심정을 ‘내가 법에 따라 사형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한낱 아홉 마리의 소 중에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假今僕伏法受誅, 九牛亡一毛)과 같을 뿐이니 나와 같은 존재는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나?
그리고 세상 사람들 또한 내가 죽는다 해도 절개를 위해 죽는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나쁜 말하다가 큰 죄를 지어서 어리석게 죽었다고 여길 것이라고 쓰고 있다.
사마천이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살아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사마천은 태사령(太史令)으로 봉직했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이 임종하면서 통사(通史)를 기록하라고 한 유언에 따라 사기(史記)를 집필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기를 완성하기 전에는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중국 최초의 사서(史書)로서 불후(不朽)의 명저(名著)로 꼽히는 사기130여권이 완성돼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오늘의 한자
九 : 아홉 구, 牛 : 소 우, 一 : 한 일, 毛 : 털 모
편집국 편집장
2018-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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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병필패(驕兵必敗)
강병을 자랑하는 군대나 싸움에 이기고 뽐내는 군사는 반드시 패한다는 뜻으로 교만(驕慢)하게 굴면서 상대(相對)를 얕보는 자는 반드시 패함을 비유한 교병필패(驕兵必敗)는 한서열전(漢書列傳) 위상전(魏相傳)에서 볼 수 있다.
전한(前漢)의 선제(宣帝)가 서역(西域)의 차사국(車師國)을 정복하기 위해 정길(鄭吉)과 사마희에게 출병을 명하자 두 사람은 대군을 이끌고 차사를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자 다급해 진 차사왕은 개노국에 구원병을 요청했지만 개노국이 구원병을 보내주지 않자 할 수 없이 항복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개노국의 대신들은 후회하고 왕에게 ‘차사국 땅은 기름지고 우리 땅과 가까우므로 언제 침략을 당할지 모를 일이므로 이 위기국면을 벗어나려면 승리감에 도취해 군기가 해이해진 적의 허점을 노려 기습공격을 감행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고 진언했다.
이에 개노국 왕은 이를 받아들여 즉시 기습공격을 감행해 점령군을 포위하고 곤경에 빠뜨렸다.
위기에 처한 정길은 즉시 선제에게 구원요청의 파발마를 보냈으나 구원병을 즉시 파병하려는 선제에게 재상은 ‘교만한 군대가 그 위세를 뽐내는 것은 교병(驕兵)이며 이런 교병은 필패(必敗)라고 했다’며 극구 만류했다.
이에 깊이 깨달은 선제는 자신도 교만했음을 뉘우치고 즉시 증병계획을 취소시켰다고 한다.
한서(漢書) 위상전(魏相傳)에도 같은 뜻으로 병교자멸(兵驕者滅) 즉 교만한 자는 멸한다고 적혀 있다.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 흉노가 침입했으나 한나라 군대는 이를 물리칠 수가 없었다.
선제는 장군 조충국과 상의해 흉노가 약해진 틈을 타서 출병해 그들의 요지를 격파해 다시는 서역(西域)을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승상인 위상(魏相)은 ‘난국을 구하고 폭군을 죽이는 싸움을 의병(義兵)이라 하며 이런 싸움을 하면 천하의 임금이 될 수 있으며 적이 도전해 옴으로써 부득이 싸우게 되는 것을 응병(應兵)이라 하고 사소한 일로 다투어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싸우는 것을 분병(忿兵)이라 하며 타인의 토지나 재산을 탐내어 싸우는 것을 탐병(貪兵)이라 하는데 이렇게 되면 나라가 문란해 지며 자기 나라의 큰 힘을 믿고 백성이 많음을 자랑해 적에게 위세를 보이기 위한 싸움을 교병(驕兵)이라 하는데 이런 싸움에선 나라가 망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길은 단순한 인사(人事)일 뿐 아니라 천도(天道)’라고 말했다.
오늘의 한자
驕 : 교만할 교, 兵 : 군사 병, 必 : 반드시 필, 敗 : 패할 패
편집국 편집장
2018-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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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맹상제(寬猛相濟)
너그러움과 엄격함이 조화를 이루어 치우침이 없이 원만하다는 뜻의 관맹상제(寬猛相濟)는 정치에 통용되는 말이다.
다시 말해 정치란 너그러움을 먼저 베풀고 다음에 엄격함을 뒤따르도록 해야 효과가 높다는 경험론으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볼 수 있다.
춘추시대 정(鄭)나라의 재상(宰相) 공손교(公損僑)는 자(字)가 자산(子産)으로 개혁파 정치가 였다.
그는 집권 10여년간 근검을 강조하고 사치를 반대했으며 토지제도와 군신제도를 고치는 한편 법을 통해 특권을 제한하고 정치 기강을 바로 잡았다.
그 결과 작고 보잘 것 없던 정나라는 국력이 크게 신장했고 국위도 선양됐는데 자산이 행한 통치술이 바로 관맹상제(寬猛相濟)였다.
자산이 병들어 죽게 되자 그는 후임자로 내정된 자태숙(子太叔)을 불러 통치술을 강의하면서 덕이 있는 자만이 백성을 따르게 할 수 있으며 그 다음은 엄격함으로 대하는 것이 상책이고 불이 뜨거우면 사람들은 이를 두려워함으로 불에 타 죽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물이란 약해 보이므로 사람들은 이를 업신여기다 물에 빠져 죽기 쉬운데 곧 너그럽게 다스리기란 어려운 일이나 한번 힘을 발휘하면 오래 간다고 말했다.
불은 엄격함으로 물을 너그러움으로 비유했다.
지나치게 엄격하면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지나치게 너그러우면 게을러지기 쉽다.
그러나 우선은 너그러워야 하고 그 다음에 엄해야 한다.
너그러움은 엄격함에 비해 훨씬 장악력이 떨어지지만 효과는 장기간에 걸쳐 나타난다.
그 시대의 인물인 노나라의 공자는 이 말을 듣고 '훌륭하다 정치가 너그러우면 백성이 게을러지는데 게을러지면 엄격함으로 바로 잡고 엄격하면 백성들이 잔인해지는 데 잔인해지면 너그러움을 베풀고 이렇게 너그러움과 엄격함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정치’라며 감탄했다.
우리나라의 정치는 전통적으로 집권 초기엔 지나칠 정도의 엄격함으로 시작했다가 후에는 관대함을 넘어서서 흐지부지 끝나는 경향이 농후하다.
즉 맹관(猛寬)의 정치라고 할까.
고전(古典)은 치국의 도리를 관맹(寬猛)으로 가르치고 있는데도 말이다.
오늘의 한자
寬 : 너그러울 관, 猛 : 사나울 맹, 相 : 서로 상, 濟 : 이룰 제
편집국 편집장
2018-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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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굉지락(曲肱之樂)
팔을 베개 삼아 잠을 자는 속에 있는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가난에 만족해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간소한 생활을 비유한 곡굉지락(曲肱之樂)은 논어(論語) 술이편(述而篇)에서 볼 수 있다.
논어(論語)에 보면 공자(孔子)가 ‘부자가 될 수 있다면 마부 노릇도 마다하지 않겠다’ 해 그도 부귀에 대한 집착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부귀를 맹목적으로 추구한 것은 아니었는데 ‘부귀는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라면 가지지 말 것이며 빈천(貧賤)은 누구나 싫어하지만 정당한 것이라면 피하지 말 것’이라고 했다.
요컨대 부귀는 정당한 방법으로 추구해야 할 것임을 강조한 것으로 부귀를 얻고자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나아가서 높은 자리에 올라 남을 다스리고 이름을 날릴 수 있다면 인생 최대의 즐거움일 것이다.
이러한 소유욕(所有欲)이 인간의 기본적 본능이며 정당한 소유욕이야말로 인류나 개인의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인간이 얻으려는 성공이나 부귀에는 끝이 없고 한이 없으며 어느 정도에서 만족할 것인가 하고 자제(自制)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대성(大成)하고도 흡족해하지 못한다면 소성(小成)하고도 만족해하는 것만 못하며 범인(凡人)으로서는 보잘것없는 성취(成就)에서도 그것이 가난한 삶일지라도 즐거움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 술이편(述而篇)에서 공자는 ‘나물 밥 먹고 물 마시고(飯疏食飮水) 팔을 굽혀 베개 삼아도(曲肱而枕之) 즐거움이 그 속에 있나니(樂亦在其中) 옳지 못한 부귀는(不義而富且貴) 나에게 한낱 뜬구름과 같다(於我如浮雲)’고 했다.
이 글에서 곡굉지락과 곡굉이침지라는 말을 찾아서 사자성어(四字成語)로 쓰고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패배자(敗北者)의 넋두리라고 할 수도 있으나 가난하지만 부끄럼 없는 생활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훨씬 값지다고 할 것이다.
아무려면 고대광실(高臺廣室)에서 호위호식하는 것보다 나을리 없겠지만 말이다.
오늘의 한자
曲 : 굽을 곡, 肱 : 팔뚝 굉, 之 : 어조사 지, 樂 : 즐거울 락
편집국 편집장
2018-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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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침무우(高枕無憂)
높은 베개를 베고 근심 없이 지낸다는 뜻으로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음을 비유한 고침무우(高枕無憂)는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에서 볼 수 있다.
풍환(馮驩)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제(齊) 나라 맹상군(孟嘗君)의 식객(食客)이었다.
당시(當時) 맹상군(孟嘗君)은 3천 식객(食客)을 부양(扶養)하기 위해 현재의 산동성 동남 지방인 설(薛) 지방(地方)에서 돈 놀이하고 있었는데 채무자(債務者)들이 빚 갚을 생각을 하지 않자 풍환(馮驩)이 빚을 받아오겠다며 자청해 나섰다.
그러나 그는 소를 잡고 잔치를 벌여 채무자(債務者)들을 배불리 먹인 다음 계약서(契約書)를 모조리 불태우고 돌아와 ‘대인 집에 없는 의(義)를 사왔다’며 있는 그대로를 설명하자 맹상군은 울화가 치밀었지만 차마 화를 내지 못했다.
후(後)에 맹상군이 상국(相國)의 지위(地位)를 박탈(剝奪)당하고 설(薛)에 잠시 머무르게 됐는데 주민들의 환영(歡迎)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 때 풍환은 ‘교활(狡猾)한 토끼는 구멍을 세개나 뚫는데(狡兎三窟) 지금 경(卿)은 한 개의 굴을 뚫었을 뿐이므로 아직 고침무우(高枕無憂)하기는 이르니 나머지 두개의 굴도 뚫어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맹상군을 위해 양혜왕(梁惠王)을 설득 양혜왕이 금은보화를 준비해 세 번이나 맹상군을 불렀지만 그 때마다 풍환은 응하지 말 것을 은밀히 권했다.
이 사실을 안 제왕은 그제서야 맹상군의 진가를 알아차리고는 그를 상국 지위에 부직시켜 주어 두 번째 굴이 완성됐다.
후에 풍환은 다시 맹상군을 시켜 설에 종묘를 짓게 해 설의 안전을 도모하도록 했는데 종묘가 완성되자 풍환은 ‘이제 세 개의 굴이 모두 완성된 것으로 경께서는 비로소 베개를 높이 베고 즐기실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중국의 인물 중 전국 4공자로 호칭되는 인물들이 있는데 전국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고 걸출했던 왕족 중의 한사람으로 흔히 제 나라의 맹상군, 조 나라의 평원군, 위 나라의 신릉군, 초 나라의 춘신군을 전국 4공자라 부르며 이들은 대개 수 천명이 넘는 식객을 거느렸다 하며 이 식객들로부터 갖가지 술수와 지략 사건들이 엮어져 나왔다.
제(齊)의 맹상군(孟嘗君)의 이름은 전문(田文)이며 그의 부친은 전영으로 제 나라 위왕(威王)의 아들로 재상을 지냈다.
전영에게는 40여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전영의 첩 하나가 5월 5일에 아들을 낳았고 그 날 태어난 아이는 키가 지게문 높이까지 자라면 부모에게 해를 준다해 전영이 내다 버리라고 했으나 첩은 몰래 키웠다.
후에 이를 안 전영이 첩을 힐책하자 어린 문은 ‘사람의 운명은 하늘로부터 받느냐 아니면 문지방으로부터 받는냐’고 묻고는 문지방 문으로부터 받는다면 그 문을 높이면 될게 아니냐며 따질 정도로 영리했다.
후에 전영은 문을 후계자로 삼고 전영이 죽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설 땅의 영주가 되니 이 사람이 맹상군이다.
맹상군이 설(薛)땅에 있으면서 가산을 기울여 빈객들을 정성껏 대우하자 천하의 인물들이 다 모여들어 빈객의 수가 수천에 이르고 맹상군의 명성도 천하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맹상군이 현명하다는 소문을 들은 진(秦) 나라 소양왕(昭襄王)은 제 나라에 사신을 보내 맹상군을 진으로 초청했다.
맹상군은 식객을 인솔하고 진 나라로 들어가 진왕을 만났고 진왕은 즉시 맹상군을 재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주위 신하들이 반대해 그를 죽이려 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맹상군은 진 왕이 총애하는 첩에게 사람을 보내 풀어줄 것을 요청하자 첩은 맹상군이 진 왕에게 바친 여우 겨드랑이의 힌 털로 만든 호백구(狐白求+衣)를 원했다.
호백구는 진품으로 하나밖에 없어 맹상군이 고민하자 식객 중의 하나가 개 흉내를 내어 창고속의 호백구를 훔쳐 돌아왔다.
호백구를 첩에게 바쳐 간신히 풀려나와 함곡관에 도착했을 때 진 왕은 맹상군을 풀어준 것을 후회하고 그를 뒤 쫒게 했으며 첫 닭이 울어야 성문을 열게 돼 있어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식객의 기지로 성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 후 빈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맹상군을 따르게 됐다.
조(趙)의 평원군(平原君) 이름은 조승(趙勝)으로 조 나라 여러 공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조 나라 혜문왕과 효성왕의 재상으로 있었는데 세 차례나 재상자리를 떠났다가 세 차례 다시 재상에 올랐다.
평원군은 첩중의 하나가 지나가는 절름발이를 보고 비웃었다하여 첩의 목을 베라는 절름발이의 청원을 들어준 후로 그의 휘하에 수천 명의 선비가 모여들었다.
진 나라가 조 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하자 조왕은 초에 원군을 청하기 위해 평원군을 사신으로 보내기로 했는데 평원군은 출발 전 지용을 겸비한 19명을 선발했으나 나머지 한 사람을 고르지 못했다.
문하 중에 모수라는 사람이 나섰는데 평원군은 그가 누구인지 몰라 물었더니 3년간이나 식객으로 있었다하여 평원군은 ‘대체로 현명한 선비는 주머니속의 송곳과 같아 금새 밖으로 나오는 마련’이라 하니 모수가 ‘오늘 저를 주머니 속에 넣어주시길 바라며 만일 일찍 주머니 속에 있게 했더라면 송곳의 자루까지 나왔을 것’이라 말하며 끼어 줄 것을 간청해 20명을 채워 진 나라로 동행케 했다.
진 나라로 간 평원군은 모수의 기지로 진왕과 담판하여 조초 동맹을 맺는 성과를 가지고 돌아온 후 모수를 상객으로 모셨는데 그래서 낭주지추(囊中之錐)와 모수자천(毛遂自薦)이란 고사가 나왔다.
사마천은 평원군을 혼탁한 세상에서 얻기 드문 훌륭한 공자였으나 나라를 다스리는 큰 이치를 알지는 못했다고 평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그릇된 말에 빠져 장평의 군사 40여 만명을 산채로 매장케 하고 한단을 거의 멸망시킬 뻔 했던 장편전투를 두고 한 말이다.
위(魏)의 신릉군(信陵君)의 이름은 무기(無忌)이며 위 나라 소왕의 막내아들로 안회왕의 배다른 동생으로 신릉군의 누이가 평원군에게 시집을 가 조 나라 평원군과는 처남 매부지간이다.
전국시대 사공자 중 가장 어질고 능력 있는 선비로서 빼어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으며 식객은 누구를 막론하고 겸손하게 예를 갖추어 대해 사방에서 식객들이 몰려와 3천명에 달했다.
위 나라에 숨어사는 후영이라는 선비가 있었는데 그는 가난해 대량성의 이문을 지키는 문지기였는데 신릉군이 선물을 보내 모시려 했으나 후영은 받질 않았다.
하루는 연회를 열어 빈객이 많이 모이게 한 후 몸소 후생을 찾아가 마차 옆에 앉게 하니 후생은 사양하지 않고 신릉군은 더욱 예를 갖추었고 오는 중간에 후생이 마차를 기다리게 하고 푸줏간에 있는 친구와 장시간 얘기를 주고 받아도 신릉군은 낯빛이 변하지 않고 공손하게 기다렸다.
후생은 술자리에서 공자에게 ‘오늘 저도 공자를 위해 일을 할 만큼 했습니다. 저는 한낱 문지기로서 공자께서 손수 수레를 끌고 와 저를 예를 갖춰 맞이해 주셨고 일부러 공자의 수레를 오랫동안 시장 한 가운데 세워두게 해 공자의 눈치를 살폈더니 공자께서는 더욱 더 공손했으며 시장 사람들은 저를 소인이라고 하고 공자를 덕행이 있으면서 선비에게 몸을 낮추는 분이라고 했을 것’이라 말했다.
진 나라 소왕이 조 나라 군대를 장평에서 깨치고 다시 군사를 몰아 조 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하자 조는 각국에 원군을 청했다.
먼저 신릉군과 사돈국인 위에게 청해 위왕이 장군 진비를 시켜 군사 10만을 이끌고 조를 지원하라 했으나 진왕이 위협해 위왕 군사가 관망하고 있을 때 신릉군은 빈객들을 이끌고 후생의 기지로 장군 진비의 첩을 이용해 부절을 훔쳐내어 조 나라 군대를 지휘해 진 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물러나게 했다.
위왕은 신릉군이 병부를 훔쳐 왕명이라 속이고 군사를 지휘한 것을 알고 화를 내 신릉군은 조 나라에서 10년을 머물었고 진 나라는 신릉군이 조 나라에 있다는 것을 알고 위를 공격해 위왕은 사자를 보내 신릉군을 돌아오도록 했다.
신릉군은 돌아와 위, 초, 연, 한, 조의 5국 연합군을 이끌고 함곡관에서 진 나라 군대를 무찔러 그 위세를 천하에 떨쳤다.
당시 제후의 빈객들이 앞 다투어 공자에게 병법을 올려 공자가 이를 이름을 붙였는데 오늘날 전하는 위공자병법(魏公子兵法)이다.
진 나라 왕은 신릉군이 죽인 진비의 옛 빈객을 찾아내 신릉군을 위왕에게 모함토록 하자 위왕도 신릉군 대신에 다른 사람을 장군으로 삼았고 이에 신릉군은 빈객들과 밤낮으로 술로 4년간 보내다가 결국 술 중독으로 죽고 말았다.
진 나라는 신릉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위를 공격해 20개 성을 함락시켰는데 사마천은 신릉군의 명성이 제후들 사이에서 으뜸이었던 것이 결코 헛소문만은 아니었다며 이상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초(楚)의 춘신군(春申君)은 성이 황이고 이름이 헐(歇)이며 여러 나라를 두루 다녀 견문이 많고 변설에 뛰어났으며 국력이 쇠퇴해졌을 때 진 나라 소왕을 설득시켜 곤경에 빠진 초 나라를 도와주도록 했다.
춘신군은 진 나라에 태자 완(完)과 함께 불모로 가 있었는데 초 나라 왕이 병들자 태자와 가까운 진 재상 범수를 설득하고 태자를 변장시켜 태자를 진에서 빠져나가게 한 후 자신은 진왕에게 자수해 처벌을 요청했으나 범수의 진언으로 초 나라로 돌아가게 했다.
초 나라 경양왕이 죽고 태자 완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고열왕으로 왕은 황헐을 재상에 임명하고 춘신군에 봉했다.
진 나라가 조 나라 수도를 포위하자 조는 초에게 구원을 청해 춘신군으로 하여금 그들을 구하게 했다.
춘신군이 재상이 된지 14년 되던 해에 진은 장양왕이 왕위에 올라 여불위를 재상으로 삼아 동주(東周)를 차지하고 계속해서 주변국들을 위협했다.
제후들이 합종해 초 나라 왕이 합종의 맹주가 되고 춘신군이 연합군을 이끌고 진 나라를 공격했으나 그만 싸움에 패해 달아난 일로 왕(고열왕)과 사이가 벌어지고 말았다.
초 나라 고열왕은 후계가 없어 춘신군이 걱정하자 조 나라 이원(李園)이란 자가 누이를 춘신군에게 바쳐 잉태케 한 후에 누이와 일을 꾸며 춘신군이 왕에게 이원 누이를 추천토록 했다.
몇 달 후 그녀가 아들을 낳아 태자가 되고 이원 누이는 왕후가 되어 이원이 정사에 관여하게 되자 이원은 춘신군과의 비밀이 새어나갈까 두려워 춘신군을 죽이려 하자 이를 눈치 챈 신하 주영이란 자가 춘신군에게 이원을 죽일 것을 간언했으나 춘신군은 자신이 이원을 그토록 잘 대접해 주었는데 그럴리가 없다며 받아주질 않았다.
결국 고열왕이 죽어 춘신군이 궁안으로 들어서자 미리 숨어있던 이원의 병사들이 춘신군의 목을 베고 그 집안사람들을 모조리 죽였다.
춘신군의 총애를 받아 아이를 가진 뒤 초 나라 왕에게 바쳐졌던 이원의 누이동생이 낳은 아들이 왕위에 올라 유왕(幽王)이 됐다.
이 무렵 진 나라는 여불위가 쫒겨나고 노예의 반란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고 삼족이 몰살되는 변이 있었다.
사마천은 춘신군에 대해 춘신군이 진왕을 설득하고 몸을 던져 초 나라 태자를 돌아오게 한 것은 얼마나 뛰어난 지혜인가?
그러나 이원에게 당한 것은 늙어서 사리판단에 어두운 탓이며 세인의 말에 마땅히 결단을 내려야할 때에 결단을 못 내리면 도리어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이는 춘신군을 두고 한 말인가?
오늘의 한자
高 : 높을 고, 枕 : 베개 침, 無 : 없을 무, 憂 :근심 우
편집국 편집장
2018-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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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복격양(鼓腹擊壤)
고복격양(鼓腹擊壤)은 배를 두드리고 발을 구르며 흥겨워 한다는 뜻으로 백성들이 태평세월을 누린다는 뜻으로 십팔사략(十八史略) 제요편(帝堯篇)과 악부시집(樂府詩集) 격양가(擊壤歌)와 사기(史記) 오제본기편(五帝本紀篇)에서 볼 수 있다.
유가(儒家)는 성군(聖君)의 표상(表象)으로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을 꼽는데 두 임금의 치세는 아직 고증이 되지 않아 신화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으나 공자나 맹자 같은 성인이 가상이나 전설의 인물을 그토록 받들고 거론했겠느냐는 반론이 있다.
천하(天下)의 성군(聖君)으로 꼽히는 요 임금이 천하를 통치한지 5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자신의 통치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평복으로 거리에 나섰는데 어느 네거리에 이르자 어린 아이들이 손을 맞잡고 요임금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입아증민(立我烝民) 우리가 이처럼 잘 살아가는 것은
막비이극(莫匪爾極) 모두가 임금님의 지극한 덕이네
불식부지(不識不知)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순제지칙(順帝之則) 임금님이 정하신 대로 살아가네
요 임금은 어린이들의 순진한 노랫소리에 기분이 매우 좋았고 마음이 흐뭇해진 요 임금은 어느 새 마을 끝까지 걸어갔다.
그곳에는 머리가 하얀 한 노인이 우물우물 무언가 씹으면서 손으로 배를 두드리고 발로 땅을 구르며(鼓腹擊壤)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일출이작 일입이식(日出而作 日入而息)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네
경전이식 착정이음(耕田而食 鑿井而飮) 밭을 갈아 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니
제력하유우아제(帝力何有于我哉) 임금님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요.
백발노인의 고복격양(鼓腹擊壤)에 요 임금은 정말 기뻤다.
백성들이 아무 불만 없이 배를 두드리고 발을 구르며 흥겨워하고 정치의 힘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으니 그야말로 정치가 잘 되고 있다는 증거였으며 이 노래의 내용은 요 임금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정치였다.
다시 말해서 요임금은 백성들이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스스로 일하고 먹고 쉬는 이른바 무위지치(無爲之治)를 바랐던 것이다.
요임금의 덕택이다, 좋은 정치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보다 그 노인처럼 백성이 정치의 힘을 의식하지 않고 즐겁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이상적인 정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요임금은 자신이 지금 정치를 잘 하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도교(道敎)의 창시자 노자(老子)도 이런 정치를 두고 무위(無爲)의 치(治)라고 했으며 정치론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리고 요 임금처럼 지배자가 있는지 없는지를 모를 정도로 정치를 잘하는 지배자를 최고의 통치자로 꼽았다.
격양(擊壤)은 나무로 만든 신 모양의 양(壤)을 땅에 세워놓고 떨어진 곳에서 다른 양을 던져서 격(擊) 맞추는 놀이라는 설과 흙으로 만든 악기를 타는 일이라는 설이 있다.
오늘의 한자
鼓 : 두드릴 고, 腹 : 배 복, 擊 : 칠 격, 壤 : 부드러운흙 양
편집국 편집장
2018-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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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후주(枯木朽株)
쓰이지 못한 사람이나 물건(物件)을 비유한 고목후주(枯木朽株)는 사기(史記) 노중련(魯仲連) 추양열전(鄒陽列傳)에서 볼 수 있다.
서한(西漢) 경제(景帝) 유계(劉啓)가 재위하던 시절 추양(鄒陽)이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엄기(嚴忌)와 매승(枚乘) 등과 함께 오왕(吳王) 유비의 수하에서 벼슬을 하게 됐는데 그들은 모두 뛰어난 문장력과 언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용됐다.
후에는 오왕양이 반란을 꾀하자 추양은 이를 따르지 않고 곧 간언하는 글을 올렸다.
오왕 유비가 이러한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자 추양은 엄기, 매승 등과 함께 양(梁)나라 효왕(孝王) 유무(劉武)에게 귀순했다.
양 효왕의 심복인 양승(羊勝)과 공손궤(公孫詭) 등은 추양의 재능을 시기해 효왕의 면전에서 추양을 중상하자 양 효왕은 크게 노해 곧 추양을 감옥에 가두고 사형에 처할 준비를 했다.
추양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서 양 효왕에게 글을 올려 자신의 결백을 스스로 변호했다.
추양은 자신의 글에서 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열거하면서 의심을 받고 신임을 얻지 못했던 이들이 모두 충정지사(忠貞之士)였음을 밝혔다.
그는 양 효왕에게 사실을 정확히 살펴 인재가 억울함을 당하지 않고 중용(重用)될 수 있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
추양은 형가(荊軻)가 연나라의 태자 단(丹)을 위해 진나라 왕을 죽이려다 실패해서 그의 일족이 연루돼 죽게 된 일과 오 나라 왕 합려가 왕자 경기를 죽이려 하자 오왕의 신하 요리가 자기의 처자를 태워 죽인 것 등을 예로 들면서 글을 이어 나갔다.
저는 명월주(明月珠)나 야광의 벽(璧)도 어두운 길을 사람에게 던지면 칼을 잡고 노려보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인데(明月之珠, 夜光之璧, 以闇投人于道路, 人無不按劍相眄者) 이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무 내력도 없는 것이 눈앞에 날아왔기 때문이며 구부러진 나무뿌리가 서리고 굽고 뒤틀어졌지만 만승 군주의 기물(器物)이 될 수 있는 것은 좌우의 사람들이 그 뿌리를 조각하고 장식을 해 군주에게 바치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인연도 없는데 눈앞에 날아오면 천하제일인 수후(隋侯)의 주(珠)나 야광의 벽일지라도 원한만 살 뿐 덕으로 여기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미리 알려 준 바라면 마른 나무나 썩은 등걸을 바치더라도 공로가 있다 해서 잊여지지 않게 되는 것(故有人先談, 則以枯木朽株樹功而不忘)입니다.
지금 군주들은 천하의 식견과 기량이 위대한 선비들을 군왕의 권력의 무게에 짓눌리게 하고 세력 있는 벼슬만을 최고로 여기어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고 행실을 더럽혀 가면서까지 아첨하기를 좋아하고 있어 뜻 있는 선비들은 차라리 험한 동굴 속에 숨어 엎드려 죽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의 글이 양 나라 효왕에게 바쳐지자 효왕은 사람을 보내서 추양을 옥에서 석방하고 상객(上客)으로 대우했다.
오늘의 한자
枯 : 마를 고, 木 : 나무 목, 朽 :썩을 후, 株 : 그루 주
편집국 편집장
2018-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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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황실조(驚惶失措)
직역하면 놀라 허둥대며 어쩔 줄을 모른다는 뜻으로 황(惶) 대신 황(慌 어렴풋할 황)을 쓰기도 하며 북제서(北齊書) 원휘업전(元暉業傳)에서 볼 수 있다.
북제서(北齊書)는 수(隋)나라의 이백약(李百藥)이 636년에 편찬한 북제(北齊)의 역사로 본기(本紀) 8권과 열전 42권 등 모두 50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국 25사(史)의 하나로 북제(北齊)는 동위(東魏)의 승상 고환(高歡)의 아들인 고양(高洋)이 세운 중국의 왕조(550∼577)로서 남제(南齊)와 구별해 북제라고 한다.
남북조 시대 북위(北魏)의 경목(景穆) 황제에게는 원휘업(元暉業)이라는 고손자(高孫子)가 있었는데 그는 어려서는 행동이 난잡해 강도나 도적들과 내왕했으나 나이가 들어서는 과거의 습관을 고치고 널리 경전(經典)과 사서(史書)들을 섭렵하고 글을 썼는데 훗날 역사서에서는 이러한 그의 모습을 지조(志操)와 절개(節槪)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위(魏)나라 종실(宗室)에는 원소(元韶)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위나라 효장제(孝莊帝)의 조카로서 연약해 기골(氣骨)이 없는 자였다.
북제(北齊)가 위나라를 멸한 후 제나라 신무제(神武帝)가 위나라 효무제의 황후를 자기에게 시집오게 하자 위나라 황실에서는 많은 보석들을 황후 편에 그의 집으로 딸려 보냈는데 훗날 원소는 옥새(玉璽)를 제나라 황제에게 바쳤다.
제나라 선제(宣帝)는 원소의 수염을 자르고 그에게 여자 화장을 시켜 그를 비웃었지만 원소는 말없이 받아들였다.
어느 날 원휘업는 문선제(文宣帝)를 따라 진양(晉陽)에 갔다가 궁문의 밖에서 원소를 만나자 참지 못하고 ‘너는 이 노파보다 못해 옥새를 남에게 주어버리다니 왜 부셔버리지 않고?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네가 죽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며 그를 꾸짖었다.
문선제는 원휘업의 말을 듣고 즉각 원휘업과 위나라 태무제의 손자 원효우(元孝友)까지 죽이라고 명했다.
형이 집행되려고 하자 원효우는 놀라서 어쩔 줄 몰랐으며 원휘업은 실색(失色)해 사형에 응했고 두 사람의 시체는 강물의 얼음을 깨고 그 속에 버려졌다.
원소는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했지만 그 결과는 좋지 않았으며 원휘업이 죽은 지 8년 후 원소는 다른 원씨 19가구와 함께 감옥에 갇혀 굶어죽었다.
오늘의 한자
驚 : 놀랄 경, 惶 : 두려워할 황, 失 : 잃을 실, 措 : 둘 조
편집국 편집장
2018-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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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청즉명(兼聽則明)
여러 방면의 의견(意見)을 들으면 옳고 그름이 밝혀진다는 뜻의 겸청즉명(兼聽則明)은 자치통감(資治通鑒) 당기(唐紀) 태종 정관(太宗 貞觀)에서 볼 수 있다.
당(唐)나라 태종(太宗)때 위징(魏徵)이라는 유명한 정치가가 있었는데 그는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생활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절에 들어가 생활하다가 후에는 군에 입대해 관리가 됐으며 그의 벼슬은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다.
위징은 매우 명석한데다가 역사에 정통했기 때문에 항상 당 태종에게 여러 가지 계책을 제공하며 그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당태종이 제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던 어느 날 당태종은 그에게 ‘나라의 군주로서 어떻게 해야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으며 일을 잘못 처리하는 경우 그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위징은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다 들어보면 자연스럽게 정확한 결론을 얻을 수 있지만 만약 한쪽 말만 듣고 그것을 믿는다면 일을 잘못하게 될 것’(兼聽則明, 偏信則暗)이라고 말했다.
위징은 이어서 역사적 교훈을 예로 들면서 군주가 한쪽의 말만 듣고 한쪽의 말만 믿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는지 대해 ‘진(秦)나라 이세는 조고의 말만을 믿다가 멸망하게 됐고 양(梁)나라 무제는 주이(朱異)만을 믿다가 스스로 굴욕을 당하게 됐으며 수(隋)나라 양제는 우세기(虞世基)만을 믿다가 고성각(鼓城閣)의 변을 초래했다“고 말했다.
또 “이와 반대로 상황을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많은 의견을 듣는다면 이러한 재화(災禍)는 막을 수도 있고 피할 수도 있으며 예컨대 요 임금은 자주 백성들을 찾아다니며 물었기 때문에 묘(苗)라는 나쁜 사람의 일에 대해 분명하게 알 수 있었고 순 임금은 눈과 귀가 밝았기 때문에 공공(共工)이나 곤, 환두(驩兜) 등의 잘못된 행동이 빠져나가지 못했듯이 명철하고 지혜로운 군주는 언로(言路)를 막지 않으며 아래 사람들의 상황을 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게 함으로써 비로소 정확한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위징의 말을 듣고 당태종은 그의 식견에 감탄하며 그를 더욱 존경하게 됐다.
오늘의 한자
兼 : 겸할 겸, 聽 : 들을 청, 則 : 곧 즉, 明 : 밝을 명
편집국 편집장
2018-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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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애(兼愛)
모든 인간을 똑같이 사랑함을 지칭하는 겸애(兼愛)는 묵자(墨子) 겸애편(兼愛篇)과 맹자(孟子) 진심(盡心) 상편(上篇), 묵자(墨子) 천도편(天道篇)에서 볼 수 있다.
자기와 남을 구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자신에 대해서와 같이 사랑한다면 이 세상에 다툼은 없어지고 인간은 평화로운 생활을 누릴 수가 있어 천하의 큰 이로움(天下之大利)이라고 주장한 전국시대 주(周)나라의 사상가 묵자(墨子)의 교설(敎說)이다.
겸애는 묵자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하늘의 뜻 천의(天意)에서 나온 것이라 해 도덕상의 당위(當爲)로서 인간에게 지워진 의무라 했으며 그의 정치 도덕에 일관하는 최고 원리다.
묵자(墨子) 겸애편(兼愛篇)에 묵자가 말하기를 ‘남의 나라 보기를 내 나라와 같이 하고 남의 집 보기를 내 집을 보는 것과 같이 하고 남의 몸 보기를 제 몸 같이 하라’(視人之國若視其國 視人之家若視其家 視人之身若視其身)고 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고 이롭게 하듯이 사람들도 서로 사랑하고 이롭게 해야 한다는 겸애교리설(兼愛交利說)은 바로 묵자와 같은 신(神)을 믿는 종교인에게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은 묵자의 겸애교리설에 대해 시경(詩經)에서 남을 사랑하면 반드시 남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남을 미워하면 반드시 남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법이라 한 것과 일치한다.
맹자(孟子) 진심(盡心) 상편에서 ‘묵자는 겸애를 머리 꼭대기에서 발뒤꿈치까지 닳더라도 천하에 이가 되면 이를 한다(墨子兼愛 摩頂方踵 利天下爲之)고 평가했다가 나중에는 겸애설을 ’아비를 업신여기고 군왕을 업신여기는’(無父無君) 사상이라 해 심하게 공격했다.
묵자는 천도편(天道篇)에서 겸애는 사심(私心)이 없으니 바로 어질고 의로운 마음(兼愛無私此仁義之情也)이라고 해 공자(孔子)의 인애(仁愛)를 차별해 질서를 중시하고 가족을 중심으로 한 폐쇄된 생활공동체에 대한 사랑이라 해 이를 반대했다.
천하의 해(害)를 제거하고 천하의 이(利)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인자(仁者)의 사명이다.
강자가 약자를 협박하고 다수가 소수를 업신여기고 사이비 군자가 국민을 기만하고 군주가 횡포를 부리고 신하가 불충을 저지르며 부모가 애정이 없는 것 자식이 효성을 다하지 않는 것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하의 해는 남을 증오하고 남에게 불이익을 주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러한 사상을 하나의 이상으로서만 인정되고 있을 뿐 현실적으로는 유가(孺家)의 사상이 이 사회에서 뿌리를 박고 있다.
겸애설(兼愛說)은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묵적(墨翟)과 그 주장을 신봉하는 학파인 묵가(墨家)의 대표적인 주장을 말한다.
중국의 전국시대 때 묵가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듯이 남을 사랑하고 자기 집과 자기 나라를 사랑하듯이 다른 나라를 사랑하면 천하가 태평하고 백성이 번영하는데 이는 단순히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신분계급이 엄격했던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주장이었으며 이러한 교설은 유가(儒家)에서 주장하는 인애(仁愛)와 비슷하나 유가의 그것이 부자(父子) 군신(君臣)이라는 관계를 중시하고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차례로 멀리 미치는 것임에 비해 묵가의 그것은 이러한 가깝고 먼 것의 구별보다는 자기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만인을 사랑하라고 주장한 점이 크게 다르다.
이 때문에 맹자(孟子)로부터 아버지나 임금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비난받았다.
오늘의 한자
兼 : 겸할 겸, 愛 : 사랑 애
편집국 편집장
2018-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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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초보은(結草報恩)
결초보은(結草報恩)을 직역하면 풀을 맺어 은혜에 보답 한다는 뜻으로 죽어서까지 라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다는 말로 죽어 혼령이 돼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음을 의미하는 결초보은(結草報恩)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傅)에서 볼 수 있으며 촉한(蜀漢)의 이밀(李密)의 진정표(陳情表)에도 인용되고 있다.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위무자(魏武子)에게 젊은 첩이 있었는데 위무자가 병이 들자 본처의 아들 과(顆)를 불러 ‘네 서모를 내가 죽거들랑 개가(改嫁) 시키도록 해라’했으나 위무자의 병세가 점점 악화돼 위독한 지경에 이르게 되자 아들 과(顆)에게 다시 분부하기를 ‘내가 죽거들랑 네 서모는 반드시 순사(殉死)케 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위무자가 죽자 아들 과(顆)는 ‘사람이 병이 위중하면 정신이 혼란해지기 마련이니 아버지께서 맑은 정신일 때 하신 말씀대로 따르리라’하고는 아버지의 처음 유언을 따라 서모를 개가(改嫁)시켜 드렸다.
그후 진(秦)나라 환공(桓公)이 진(晉)나라를 침략해 군대를 보씨(輔氏)에 주둔시켰다.
보씨의 싸움에서 위과(魏顆)는 진(晉)의 장수로 있었기 때문에 진(秦)의 대역사(大力士) 두회(杜回)라는 장수와 결전을 벌이게 됐는데 위과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싸움터에서 한 노인이 땅에서 무성하게 자라난 풀들을 잡아매어(結草) 온 들판에 매듭을 만들어 놓아 진(秦)나라 말들이 그 풀 매듭에 걸려 쓰러지자 말에 타고 있던 진나라 병졸들은 여지없이 말 위에서 떨어져 땅에 나뒹굴었다.
위과(魏顆)는 이 때를 틈타 사나운 맹수와 같이 군대를 이끌고 총 공격을 해 싸움을 순조롭게 승리로 이끌고 적장 두회를 사로 잡았다.
그날 밤 위과의 꿈에 그 노인이 나타나 ‘나는 당신 서모의 애비되는 사람으로 그대가 아버지의 유언을 옳은 방향으로 따랐기 때문에 내 딸이 목숨을 유지하고 개가(改嫁)해 잘 살고 있으며 나는 당신의 그 은혜에 보답(報恩)하고자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결초보은(結草報恩)이란 죽어 혼백이 되어서까지 은혜를 갚는다는 뜻으로 쓰이게 됐다.
오늘의 한자
結 : 맺을 결, 草 : 풀 초, 報 : 갚을 보, 恩 : 은혜 은
편집국 편집장
2018-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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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죽사난사(擊竹事難事)
대나무를 다 사용해 써도 그의 악행을 다 쓸 수 없다는 뜻으로 필설(筆舌)로 다 할 수 없으리만큼 죄악을 저질렀다는 격죽사난사(擊竹事難事)는 후한서(後漢書) 왕망전(王莽傳)에서 볼 수 있다.
전한(前漢) 말기에 왕망(王莽)이 한(漢)나라의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한나라를 뺏은 다음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라 국호를 신(新)이라 부르고 왕조를 개창했다.
토지제도의 개혁에 있어 왕토사상(王土思想)을 내세워 전국의 토지를 왕전(王田)이라 해 매매를 금지시켰으며 전지(田地) 소유면적을 제한하고 지주와 호족(豪族)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3년 만에 폐지했다.
관제(官制)개혁도 행정의 원활성이 없어 관민이 모두 혼란에 빠졌으며 조정이 시장거래에 개입해 상품유통을 저해했으며 경제면에서 대혼란을 일으켰다.
한에 복속(服屬)한 군장(君長)을 후(侯)로 격하하는 등 주변 제민족(諸民族)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왕망은 백성들을 총동원해 광대한 지역에다 거대한 궁궐을 짓게 하니 가혹한 노동으로 인해 쓰러지는 백성의 수가 줄을 이었고 시체는 산을 이루자 악정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각지에서 벌떼처럼 궐기해 왕망 타도를 외치며 장안(長安)을 향해 진격을 개시했는데 이 당시 서주(徐州)의 상장군(上將軍)인 외효는 왕망타도의 격문(檄文)에서 '왕망의 죄는 초(楚)나라와 월(越)나라의 대나무를 모두 사용해도 다 쓸 수가 없을 정도'라고 말하며 농민군을 자극시켰다.
초나라와 월나라의 대나무로 만든 죽간(竹簡 대의 조각을 엮어서 만든 책)을 다 사용해 써도 그 악행을 다 적을 수가 없다는 뜻으로 여기서 초나라와 월나라는 대나무의 명산지다.
그 후 왕망은 한(漢)의 유수(劉秀)가 장안(長安)으로 진격하자 패사(敗死)했다.
왕망(王莽)은 중국 전한(前漢) 말의 정치가로 신(新) 왕조의 건국자로 자는 거군(巨君)이며 산둥(山東) 출생으로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왕후인 왕(王)씨 서모의 동생인 왕만(王曼)의 둘째 아들로 갖가지 권모술수를 써서 사실(史實)상 최초로 선양혁명(禪讓革命)에 의해 전한의 황제권력을 빼앗았다.
왕 왕후의 아들 성제(成帝)가 즉위하자 왕망의 큰아버지 왕봉(王鳳)이 대사마대장군영상서사(大司馬大將軍領尙書事)가 돼 정치를 한 손에 쥐었다.
왕망은 불우하게 자랐으나 유학을 배웠고 어른을 잘 섬겼으므로 왕봉의 인정을 받아 황문랑(黃門郞)이 되고 봉읍(封邑) 1500호를 영유하는 신야후(新野侯)가 됐으며 그 뒤 왕씨 일족의 두령으로서 지위를 굳히고 38세로 재상이라 할 수 있는 대사마(大司馬)가 됐다.
다음의 애제(哀帝) 때에 신흥 외척의 압박을 피해 한때 정계에서 물러났으나 애제가 1년 만에 아들 없이 죽자 태황태후 왕씨와 쿠데타에 성공해 대사마에 복귀해 9세의 평제(平帝)를 옹립하고 자기의 딸을 왕후로 삼았으며 자기에게는 안한공(安漢公) 재형(宰衡)이라는 칭호를 붙여 평제의 보정자(輔政者)로서의 외관을 갖추었다.
그 뒤 평제를 독살하고 2세의 유영(劉拏)을 세워 당시 유행하던 오행참위설(五行讖緯說)을 교묘히 이용하며 인심을 모았으며 자기를 스스로 가황제(假皇帝)라 하고 신하들에게는 섭황제(攝皇帝)라 부르게 했다.
그리고 ‘안한공 왕망은 황제가 되라’는 붉은 글씨가 씌어진 흰 돌이 나타나게 하고 왕망이 황제가 되라는 하늘의 의사표시로 간주되는 새 우물을 출현시키는 연극을 벌였다.
이 신비적인 형태를 수반해 인간에게 표시되는 천명(天命)을 부명(符命)이라 하는데 왕망은 이 부명을 교묘히 이용해 유영을 몰아내 한 나라를 멸망시키고 국호를 신이라 해 황제가 됨으로써 선양혁명에 성공했다.
황제 왕망은 복고적 색채를 띤 여러 가지 번잡한 정책을 폈는데 주(周)나라 시대의 정전법(井田法)을 모방해 토지개혁을 단행했는데 이것은 지방호족의 대토지소유를 제한하고 자영농민의 빈민화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또 가난한 농민에게 싼 이자의 자금을 융자해 주는 사대제도(痂貸制度)를 두기도 했는데
이것도 사상적으로는 유교교전인 주례(周禮)에서 볼 수 있는 고전적인 것이나 화폐제도 개혁과 평준(平準) 균수(均輸) 등 여러 상공업통제책과 함께 당시의 현실이 요청하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개혁정책은 결과적으로 한 말의 여러 모순과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모두 실패했는데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제지배를 꾀한 그의 정책은 오히려 농민들에게 고통을 주었고 각지에 있는 호족들과의 이해(利害)가 상반된 점에 실패의 원인이 있었다.
그는 대외정책에도 실패해 사회혼란을 증대시켰으며 흉노(匈奴)와 서역 여러 나라가 그를 이반(離反)했고 동쪽에서는 고구려와 충돌했으며 이와 같이 내외정세가 악화된 속에서 적미(赤眉)의 난이 일어났고 각지의 농민과 호족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다.
한나라 황족의 한 사람인 난양(南陽)의 호족 유수(劉秀)가 군대를 일으켜 이듬해 곤양(昆陽)에서 왕망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왕망은 장안(長安)의 미앙궁(未央宮)에서 부하에게 찔려 죽음으로써 건국한지 15년에 멸망하고 후한이 그 뒤를 이었다.
죽간(竹簡)은 2세기 초엽에 종이가 발명되기 전까지 가장 많이 사용된 서사재료(書寫材料)로 종이 이전의 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죽간을 만들려면 우선 대나무의 마디를 잘라낸 다음 마디 사이의 부분을 세로로 쪼갠 대나무패를 불에 쬐어 기름을 빼는데 이것은 글씨를 쓰기 좋게 하고 벌레 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며 길이는 20∼25cm이며 너비는 몇 cm로 한 줄밖에 못 쓰기 때문에 여러 장을 합쳐서 가죽 또는 비단으로 된 끈으로 편철(編綴)하는데 이와 같이 몇 장의 간(簡)을 편철한 것을 책(策) 또는 책(冊)이라고 불렀다.
죽간은 그 실물이 20세기에 들어와서 중국 북서쪽 볜징(邊京)에서 유럽의 학술탐험대에 의해서 한대(漢代)의 것이 발견됐으며 1951년 이후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 등지에서는 그 이전인 전국시대의 죽간도 잇달아 발견되고 있다.
또 죽간을 모방해서 만든 목간(木簡)도 사용됐는데 이것을 찰(札) 또는 첩(牒)이라고 불렀는데
중국의 북서쪽 볜징에서 발견된 것은 거의 목간이었으며 약(藥)의 처방전(處方箋) 등이 적혀 있는 죽간이 약간 포함돼 있었다.
오늘의 한자
擊 : 칠 격, 竹 : 대 죽, 事 : 일 사, 難 : 어려울 난, 事 : 일 사
편집국 편집장
2018-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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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수(黔首)
백성을 뜻하는 말인 검수(黔首)는 사기(史記)와 서경(書經)에서 볼 수 있다.
옛날 중국에서는 일반 서민은 보통 관(冠)을 쓰지 않고 검은 맨머리를 드러내고 다닌 데서 연유해 생긴 말이다.
검려(黔黎), 여민(黎民), 여서(黎庶), 여수(黎首), 여원(黎元)이라고도 하며 검(黔)과 여(黎)는 검은 색을 뜻한다.
사기(史記)의 시황본기(始皇本紀)에는 ‘새로이 백성을 검수라고 일컫는다’라는 대목이 있고 서경(書經) 요전(堯典)의 주(註)에는 ‘여(黎)는 검은 빛인데 백성의 머리가 모두 검은 빛이므로 여민이라 한다’라는 대목이 있다.
백성(百姓)은 자전적(字典的) 의미로는 서민(庶民)이라는 뜻과 서민에 대한 대칭으로서 백관(百官)의 부형자제(父兄子弟)라는 뜻을 모두 지니나 보통의 경우에는 주로 후자의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그 강조하는 의미가 조금씩 달라 신라에서는 백성이 일반적으로 피지배 공민(公民)을 의미해 골품제에 의해 생활수준이 규제됐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백성을 특정 신분층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 구체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촌락의 지배자인 촌장(村長), 촌정(村正)이라는 견해와 백성성(百姓姓)이라는 특정 성씨(姓氏)를 가진 사회집단이라는 견해, 또 인리(人吏)와 같은 신분이라는 견해 등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이전 시기에 비해 고려 전기에는 백성의 의미는 보다 확대돼 지방 사회의 지배층을 포함한 용어로 사용됐다.
인리백성(人吏百姓), 향리백성(鄕吏百姓), 기인백성(其人百姓), 장리백성(長吏百姓), 서인백성(庶人百姓) 등이 바로 그러한 용례며 이는 지역공동체의 지배세력이 통일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 변동기를 수습하면서 지역사회 내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지역 내의 민(民)과 자신을 백성으로 동일시한 데서 사용된 것이다.
물론 같은 백성이라 하더라도 이들은 향리 등과 서인으로 직역이 구분됐지만 고려 전기에는 출신 군현을 중심으로 동일한 군백성(郡百姓)이라는 결속의식이 강했던 것이다.
고려 후기에는 지배층의 토지탈점(土地奪占) 등으로 농장(農庄)이 확산되면서 농민이 유랑하는 현상이 많이 일어남에 따라 지방사회 내의 결속의식이 약화되면서 백성은 피지배층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화됐다.
지배층은 신분적으로 양인(良人)인 농민을 천인(賤人)으로 삼아 토지를 경작하게 했으며 조선 전기의 기록에 보이는 고려판정백성(高麗判定百姓)은 고려 말 양인확보정책의 일환으로 이들을 백성으로 판정한 계층이며 따라서 신분적으로는 양인으로 인정받았지만 천인에 가깝게 인식되는 계층이었다.
조선 전기에 백성은 양반이나 인리, 역리, 사전, 관노 등과 구별되면서 입사(入仕)해 양반계열에 편입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지만 신분상 양인이었으며 국가에 대해 공역(貢役)을 부담하는 계층이었다.
즉 양천제(良賤制)라는 신분구조 하에서 백성은 양인에 속했지만 지배계급으로서의 양반(兩班)과 구별되는 피지배계층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된 것이다.
조선 후기 이후 반상(班常)의 구별이 심화되면서 백성은 양반에 대칭되는 상민으로서 이러한 경향이 고착됐다.
오늘의 한자
黔 : 검을 검, 首 : 머리 수
편집국 편집장
2018-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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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족경중(擧足輕重)
다리 하나를 들어 어느 쪽에 두는 가에 따라 무게 중심이 이동(移動)돼 세력의 우열이 결정된다는 뜻의 거족경중(擧足輕重)은 후한서(後漢書) 두융전(竇融傳)에서 볼 수 있다.
한신(韓信)이 한창 한(漢)의 고조(高祖) 유방(劉邦)을 도와 항우(項羽)와 싸우고 있을 때의 일이다.
제(齊)의 변사(辯士) 괴통이 찾아와 유방을 배반하고 독립해 정족지세(鼎足之勢)를 이룰 것을 권하지만 한신은 유방과의 신의(信義)를 지켜 거절했다.
당시는 초(楚)와 한(漢)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던 상황이라 한신의 거취(去就)는 유방과 항우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돼 있었고 그래서 괴통은 한신에게 ‘천하가 처음 난을 일으켰을 때는 영웅호걸(英雄豪傑)들이 연이어 크게 한 소리로 외치자 천하의 뜻있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합치고 안개처럼 모여들었으나 이때는 다만 어떻게 하면 진(秦)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만이 공통의 관심사였으나 지금은 천하가 초(楚)와 한(漢)의 둘로 나뉘어 서로 다투고 있으며 현재 한왕(漢王) 유방과 항왕(項王) 항우의 두 목숨은 장군에게 달려 있는데 장군께서 한(漢) 나라를 위하면 한이 이기고 초(楚) 나라에 가담하면 초 나라가 이기게 돼 있다’며 권했다.
한신과 같이 저울대를 쥐고 있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거족경중(擧足輕重)이다.
그러나 본디 이 말이 출현한 것은 그보다 약 230년 뒤인 동한(東漢) 초기이다.
후한서(後漢書) 두융전편(竇融傳篇)편에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국내를 평정할 때 최후까지 남은 군웅(群雄)은 하서(河西)의 두융(竇融)과 농서의 외효(潭浴) 그리고 촉(蜀)의 공손술(公孫述)이었다.
유수는 하서의 땅이 기름질 뿐 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농서와 촉에 연접(連接)돼 있어 먼저 두융을 회유(懷柔)해 둘을 치고자 했다.
그래서 두융에게 조서(詔書)를 보내 ‘지금 공손술과 외효가 다투고 있는 바 저울대는 바로 당신이 쥐고 있는데 이때 당신이 다리를 좌우 어느 쪽에 두는가에 따라(擧足左右) 저울의 무게는 달라질 것’(便有輕重)이라고 했는데 이 광무제 조서의 말 중에서 인용한 것이 거족경중(擧足輕重)이다.
결국 두융을 끌어들인 유수는 마침내 두 군웅을 멸하고 천하를 평정하게 되며 이때의 공으로 두융은 한 나라 조정에서 감찰을 맡는 정승인 대사공(大司空)에 올랐다.
이처럼 한 사람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어떤 사안(事案)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때 이를 거족경중(擧足輕重)이라고 한다.
오늘의 한자
擧 : 들 거, 足 : 발 족, 輕 : 가벼울 경, 重 : 무거울 중
편집국 편집장
2018-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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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사정(蓋棺事定)
직역하면 관 뚜껑을 덮고 난 뒤에야 안다는 뜻으로 사람은 죽고 난 뒤에야 올바르고 정당한 평가를 할 수 있다는 말로 두보(杜甫)의 시(詩) 군부견간소혜(君不見簡蘇惠)에서 볼 수 있다.
이 시는 두보가 사천성(四川省) 동쪽 기주(夔州)의 깊은 산골로 들어가서 가난하게 살고 있을 때 역시 거기에 와서 살며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는 친구의 아들인 소혜란 사람에게 편지 대신 보낸 한 편의 시다.
군부견도변폐기지(君不見道邊廢棄池)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길가에 버려진 못을
군부견전자최절동 (君不見前者최折桐)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앞서꺽여 넘어진 오동나무를
백년사수중금슬 (百年死樹中琴瑟) 백년 뒤 죽은 나무가 거문고로 쓰이게 되고
일곡구수장교룡(一斛舊水藏蛟龍)한 섬 오랜 물은 교룡을 품기도 한다
장부개관사시정(丈夫蓋棺事始定) 장부는 관을 덮어야 일이 비로소 결정된다
군금행미성노옹 (君今幸未成老翁) 그대는 아직 다행히 늙지 않았거늘
하한초췌재산중(何恨憔悴在山中) 어찌 원망하리오, 초췌히 산속에 있는 것을
심산궁곡부가처(深山窮谷不可處) 심산 궁곡은 살 곳이 못 되노니
벽력망량겸광풍(霹靂魍魎兼狂風) 벼락과 도깨비와 미친 바람까지 겸했노라
이는 사람을 겉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며 그 사람의 업적과 평가는 죽고 나서야 비로소 분명해 진다는 뜻으로 불의나 실패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
물론 죽은 후에 평가받는 것이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다.
현대 중국에서는 개관논정(蓋棺論定)이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라 한다.
관 뚜껑을 덮어야 의론이 결정 된다는 뜻으로 비판적으로 쓰인다.
그리고 진서(晉書) 유의전(劉毅傳)에도 장부개관사정(丈夫蓋棺事定)이라는 말을 볼 수 있다.
오늘의 한자
蓋 : 덮을 개, 棺 : 널 관, 事 : 일 사, 定 : 정할 정
편집국 편집장
2018-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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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퍅자용(剛愎自用)
자만(自慢)해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固執)함을 뜻하는 강퍅자용(剛愎自用)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宣公) 12년에서 볼 수 있다.
진(晉) 나라와 초(楚) 나라가 패권을 다투고 있던 때 두 나라의 틈에 있던 정(鄭) 나라는 약소국이었으므로 항상 두 나라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었다.
기원전 597년 여름 초(楚) 나라 장왕(莊王)은 구실을 만들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진(晉) 나라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정 나라를 향해 진격했고 정 나라는 결사 항전했으나 역부족이었고 정 나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진 나라 군대는 순임보(荀林父)를 중군 대장으로 선곡을 부장군으로 사회(士會)를 상군 대장으로 진군해 황하 부근에 이르러서 정 나라가 이미 초 나라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순임보는 장수들을 소집해 대책을 논의했는데 대부분 순임보의 생각처럼 상황이 종료돼 초 나라 군대가 철수한 이상 진 나라 군대도 철수하자는 의견이었으며 상군 대장 사회(士會)는 철군에 동의하며 전세(戰勢)를 ‘군사를 씀에는 틈을 보아 출동시키라고 했으며 초 나라의 우익군은 대장이 탄 전차를 끄는 말의 방향에 따라 진격하고, 좌익군은 풀을 모아 숙위(宿衛)할 준비를 하며, 띠(茅)로 깃발을 삼은 전군(前軍)은 적의 복병을 없애기 위해 진군하고, 중군은 싸움의 계략을 꾸미며, 후군은 정예부대로 후미를 단단히 지키고 있는데 사정이 좋음을 보고 진격하고,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물러난다는 것은 용병의 바른 원칙이며(見可而進 知難而退 軍之善政也) 약한 자를 쳐서 빼앗고, 어지러운 자를 공격한다는 것은 전쟁 상의 좋은 원칙이니 장군께서는 잠시 우리 군사를 정비해 무력의 충실을 꾀하시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했다.
그런데 부장군 선곡은 이런 말은 아예 듣지도 않고 강경하게 반대하고 나서며 ‘나는 죽어도 패업을 포기할 수 없으며 지금 그대들은 적들이 강하다는 말을 듣고 철수하겠다고 하는데 이는 대장부다운 행위가 아니’라며 그는 지휘에도 따르지 않고 직접 자기가 이끌던 군대를 데리고 강을 건너 초 나라 군대를 추격했다.
일이 이쯤 되자 순임보도 어쩔 수가 없어 전군(全軍)에 그의 뒤를 따라 전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침 철수하고 있던 초 나라 군대는 진 나라 군대의 추격 소식을 듣고 초 나라 군대는 대부(大夫) 오삼(伍參)은 돌아서서 진 나라 군대를 공격하자고 했고 영윤(令尹) 손숙오(孫叔敖)는 싸우지 말고 계속 철군하자고 했다.
그러자 오삼이 초 나라 장왕에게 자신의 분석과 의견을 말하길 ‘진 나라 군대의 순임보는 새로 임명된 장군이라 그의 위엄과 신망이 그다지 높지 않으며 부장군 선곡은 고집이 세고 모질어서 명령을 따르려 하지 않으니 돌아가서 공격한다면 크게 이길 것’이라 말했다.
오삼의 분석에 따라 초 나라 왕은 손숙오에게 군대를 돌려 진 나라 군대와 싸우게 한 결과는 초 나라가 대승(大勝)을 거뒀다.
진 나라 경공(景公)은 패전하고 돌아온 중군 대장 순임보(荀林父)의 관직을 박탈하고 스스로 책임을 지고 죽겠다는 그를 사형에 처할 준비를 하자 대부 사정자(士貞子)가 간언을 하고 나서며 ‘문공(文公) 때 우리나라가 초 나라와 성복에서 싸워 크게 이긴 적이 있는데 문공께서는 근심하는 얼굴을 보이시자 좌우의 신하들이 이렇게 큰 승리를 거두시고 무슨 걱정이라도 있느냐고 그 까닭을 묻자 문공께서는 초 나라에 득신(得臣)이라는 재상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으로 짐승도 곤경에 빠지면 죽을힘을 다해 싸우는 것인데 하물며 한 나라의 재상임에 다시 말 할 것이 있겠소(困獸猶鬪 況國相乎)라고 말씀하셨고 후에 문공께서는 득신이 군사를 철수시키는 도중에 초 나라 성왕의 명을 받고 자살했다는 소리를 듣고 웃으시며 후환이 없어졌구나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초 나라 성왕이 득신을 죽인 것은 초 나라에게는 패배이고 진 나라에게는 승리와 같으며 왕께서 순임보를 죽이시는 것은 곧 초 나라의 승리이고 우리에게는 패배이며 순임보는 이미 여러 차례 공을 세운 바 있으며 지금은 자신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고 고치기에 마음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진 경공은 사정자의 권고를 듣고 다시 순임보의 관직을 복귀시켰다.
오늘의 한자
剛 : 굳셀 강, 愎 : 괴퍅할 퍅, 自 : 스스로 자, 用 : 쓸 용
편집국 편집장
2018-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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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36계 주위상(走为上) 때로는 작전상후퇴도 필요하다.
손자병법 제36계 주위상(走为上) 때로는 작전상후퇴도 필요하다.
때로 후퇴도 필요하다는 제36계 중 마지막 계책으로 계획적으로 후퇴하여 후퇴를 진격으로 삼고 기회를 노려 적을 섬멸한다는 뜻이다.
이 계책은 모략 가운데 상책으로 꼽히며 손빈은 후퇴로 전쟁에 임하면서 방연을 마릉도로 유인하여 일거에 섬멸하고 중국 고대 전쟁사의 화려한 한 폐이지를 장식한다.
손빈은 이 페이지를 남기고 떠나면서 손자병법과 그가 쓴 손빈 병법을 남긴다.
2000년 후 손자병법이 세상을 풍미할 때 세간에 떠도는 소문은 손자병법을 쓴 사람은 손빈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1972년 산둥성 임기현 은작산 서한묘에서 죽간이 출토 됐는데 그 중 손자병법과 손빈병법이 발견됨으로 이 주장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남북조시대 남조 제(齊)나라의 명제(明帝) 소란(蕭鸞)은 황제에 즉위한 이후 반란과 보복이 두려워 무제의 아들 17명, 형제 12명 그리고 여러 명의 손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러자 개국공신인 회계(會稽)태수 왕경칙(王敬則)이 생명의 위협을 느껴 반란을 일으켰는데 왕경칙은 군사 1만을 이끌고 수도 건강(健康)을 향해 진격했다.
당시 명제는 병이 위독한 상태였는데 왕경칙이 창졸지간에 동쪽에서 들고일어나자 조정이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명제의 둘째 아들 소보권(蕭寶卷)은 동궁에서 반란 진압을 논의하면서 사람을 시켜 지붕에 올라 살펴보게 했는데 정로정(征虜亭)에 불이 붙은 것을 보고 왕경칙이 이르렀다고 보고하자 소보권은 급히 행장을 꾸려 도망갈 준비를 했다.
누군가가 왕경칙에게 이를 보고하자 왕경칙이 “그들 부자에게 뾰족한 수가 있을 수 없겠지 단공(檀公)의 서른여섯 가지 계책 가운데 도망이 최고의 계책이라 했거늘 너희 부자는 서둘러 도망하는 게 좋겠지”라고 말했다.
왕경칙이 처음 공격해 올 때는 그 세가 아주 대단했으나 며칠 만에 패하고 말았는데 이때 왕경칙은 70여 세였다.
이 이야기는 남사(南史) 왕경칙전(王敬則傳)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주위상이라는 말이 유래했으며 주위상계(走爲上計) 혹은 주위상책(走爲上策)이라고도 한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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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35계 연환계(连环计) 여러 가지 계책을 연격시키다.
손자병법 제35계 연환계(连环计) 여러 가지 계책을 연격시키다.
연환계는 제35계로 여러 계책을 연결하여 병용한다는 뜻이다.
손빈은 조정의 내란을 제거하기 위해 먼저 추상국과 공손열을 이간질 시킨 다음 추상국을 이용하여 공손열을 속이고 다시 공손열의 일로 추상국을 그만 두도록 한다.
춘추(春秋) 말기 제(齊)나라 대부 전상(田常)이 난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국내 거족(巨族)인 고(高)씨, 국(國)씨, 포(鮑)씨, 안(晏)씨의 세력이 두려워 계획을 바꾸어 제나라의 왕 간공(簡公)에게 그들의 병력을 출동시켜 노(魯)나라를 정벌토록 부추겼다.
간공은 전상의 계획에 따라 거족들의 군사를 합쳐 노나라로 출병시키자 노나라 출신인 공자(孔子)는 고국인 노나라가 난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제자인 자공(子貢)을 제나라에 보내 노나라를 침범하지 말도록 설득하게 했다.
자공은 먼저 전상을 만나 약한 노나라를 이겨 제나라의 영토를 넓혀봐야 임금의 마음만 교만해지고 정적인 대신들과 장군들에게 공이 돌아가게 되므로 그들의 세력이 커지지만 강한 오(吳)나라를 공격하면 패하더라도 패배의 책임이 대신과 장군들에게 돌아가므로 결국 강국의 손을 빌려 재상과 뜻이 다른 정적을 제거할 수 있으며 임금을 고립시켜 재상이 나라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다는 논리를 펴 설득을 시작했다.
자공의 논리에 넘어간 전상은 자신이 위엄을 세우고 자리를 확고히 하기 위해 오나라를 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제나라의 군사들이 이미 노나라를 향해 출병한 상황이었으므로 군사들을 돌려 오나라로 향하게 할 명분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자공은 자신이 오나라 왕을 설득해 오나라가 노나라를 도와 제나라를 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자공은 오나라 왕 부차(夫差)를 찾아가 지금 제나라가 노나라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힘을 키워 오나라와 세력을 겨루려 하고 있으니 차라리 오나라가 선수를 쳐 노나라와 연합해 제나라를 이긴 후 진(晉)나라까지 굴복시키게 되면 쉽게 패업을 달성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며 부차를 부추겼다.
오왕 부차는 먼저 월(越)나라를 친 후에 자공의 계책에 따르겠다고 했는데 패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월나라가 여전히 배후에 존재하고 있으므로 부차의 입장에서는 쉽게 군사를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부차는 월왕 구천과 싸워 이겨 구천에게 회계의 치욕을 안겼으며 구천은 부차에게 잡혀가 노예 생활을 하다가 충성을 맹세하고 석방돼 본국에 돌아와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중이었다.
자공은 자신이 월나라에 가 월왕 구천이 군사를 파견해 오나라의 군사작전을 돕도록 하겠다고 했으며 그러면 월나라가 텅 비게 돼 월왕 구천도 어쩔 방법이 없게 되며 자연히 오왕 부차가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오왕 부차는 크게 기뻐했다.
자공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월왕 구천은 길을 깨끗이 쓸고 교외까지 마중을 나와 몸소 자공의 수레를 몰아 숙사까지 모셨고 오왕 부차가 노나라를 도와 제나라를 치기에 앞서 후환이 되는 월나라를 먼저 치려고 한다는 말을 들은 월왕 구천은 머리를 조아리며 그가 취해야 할 방법을 물었다.
자공은 구천에게 오왕 부차가 바라는 대로 군대를 파견하고 귀중한 보물을 바쳐 정중히 예를 갖추면 오왕은 안심하고 출병을 해 제나라를 칠 것이고 싸움에서 이기면 다시 진(晉)나라를 칠 것으로 오나라는 계속되는 강적과의 싸움에 지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월나라가 오나라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는 계책을 일러 주었고 구천은 자공의 계책을 따르기로 했다.
자공은 다시 오나라로 돌아와 오왕이 안심하고 군사를 움직일 수 있도록 월왕 구천에 대해 좋게 말해 주었으며 며칠 후에 월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월왕 구천이 군사를 파견하는 것은 물론 자신도 오왕을 따라 종군을 하겠다는 의사를 전해 왔다.
오왕은 자공의 의견을 좇아 월나라의 예물과 군사만을 거두고 월왕의 종군은 사양하고 오왕은 마침내 제나라 정벌에 나섰다.
자공은 만일 오나라가 이기게 되면 틀림없이 다시 노나라를 위협할 것을 예측하고 진나라의 힘을 빌려 오나라의 예기를 꺾을 계획을 세우고 진나라 정공(定公)을 찾아갔다.
자공은 오나라와 제나라의 싸움에서 만약 오나라가 지면 월나라가 싸움에 패한 오나라를 바로 공격할 것이므로 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오나라가 이길 경우에는 오나라가 그 여세를 몰아 진나라를 공격할 것이라며 진나라가 서둘러 전쟁 준비를 하도록 설득했다.
진나라 왕은 자공의 말을 좇아 준비를 단단히 했으며 BC 484년 오왕 부차의 군대는 애릉(艾陵)에서 제나라 군대와 맞부딪쳐 크게 무찔렀다.
승세를 탄 오왕은 과연 자공의 예상대로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했지만 오나라는 만반의 준비를 해 둔 진나라에 오히려 대패하고 말았다.
수년 후인 BC 473년 와신상담을 통해 국력을 키운 월왕 구천은 문란해진 오나라를 공격해 오왕 부차를 죽이고 설욕을 했으며 춘추시대의 마지막 패자가 됐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 나오며 당시에 자공이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서로 엮어 댄 것이 바로 연환계인데 자공은 이로써 노나라를 구하고 제나라를 뒤흔들었으며 오나라를 패하게 하고 진나라를 강하게 만들고 월나라를 패자로 만들었다.
자공이 각지를 다니면서 유세한 10년 동안 5개 나라의 정세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듯이 연환계는 여러 개체를 서로 복잡하게 연결해 상호 견제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전략으로 이때 개인의 이익이나 명예나 지위 등을 이용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는 사람은 보편적으로 자기가 속한 단체나 사회, 국가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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