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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2-20 06:0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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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뜻하는 말인 검수(黔首)는 사기(史記)와 서경(書經)에서 볼 수 있다.

 

옛날 중국에서는 일반 서민은 보통 관(冠)을 쓰지 않고 검은 맨머리를 드러내고 다닌 데서 연유해 생긴 말이다.


검려(黔黎), 여민(黎民), 여서(黎庶), 여수(黎首), 여원(黎元)이라고도 하며 검(黔)과 여(黎)는 검은 색을 뜻한다.


사기(史記)의 시황본기(始皇本紀)에는 ‘새로이 백성을 검수라고 일컫는다’라는 대목이 있고 서경(書經) 요전(堯典)의 주(註)에는 ‘여(黎)는 검은 빛인데 백성의 머리가 모두 검은 빛이므로 여민이라 한다’라는 대목이 있다.

 

백성(百姓)은 자전적(字典的) 의미로는 서민(庶民)이라는 뜻과 서민에 대한 대칭으로서 백관(百官)의 부형자제(父兄子弟)라는 뜻을 모두 지니나 보통의 경우에는 주로 후자의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그 강조하는 의미가 조금씩 달라 신라에서는 백성이 일반적으로 피지배 공민(公民)을 의미해 골품제에 의해 생활수준이 규제됐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백성을 특정 신분층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 구체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촌락의 지배자인 촌장(村長), 촌정(村正)이라는 견해와 백성성(百姓姓)이라는 특정 성씨(姓氏)를 가진 사회집단이라는 견해, 또 인리(人吏)와 같은 신분이라는 견해 등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이전 시기에 비해 고려 전기에는 백성의 의미는 보다 확대돼 지방 사회의 지배층을 포함한 용어로 사용됐다.


인리백성(人吏百姓), 향리백성(鄕吏百姓), 기인백성(其人百姓), 장리백성(長吏百姓), 서인백성(庶人百姓) 등이 바로 그러한 용례며 이는 지역공동체의 지배세력이 통일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 변동기를 수습하면서 지역사회 내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지역 내의 민(民)과 자신을 백성으로 동일시한 데서 사용된 것이다.


물론 같은 백성이라 하더라도 이들은 향리 등과 서인으로 직역이 구분됐지만 고려 전기에는 출신 군현을 중심으로 동일한 군백성(郡百姓)이라는 결속의식이 강했던 것이다.


고려 후기에는 지배층의 토지탈점(土地奪占) 등으로 농장(農庄)이 확산되면서 농민이 유랑하는 현상이 많이 일어남에 따라 지방사회 내의 결속의식이 약화되면서 백성은 피지배층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화됐다.


지배층은 신분적으로 양인(良人)인 농민을 천인(賤人)으로 삼아 토지를 경작하게 했으며 조선 전기의 기록에 보이는 고려판정백성(高麗判定百姓)은 고려 말 양인확보정책의 일환으로 이들을 백성으로 판정한 계층이며 따라서 신분적으로는 양인으로 인정받았지만 천인에 가깝게 인식되는 계층이었다.

 

조선 전기에 백성은 양반이나 인리, 역리, 사전, 관노 등과 구별되면서 입사(入仕)해 양반계열에 편입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지만 신분상 양인이었으며 국가에 대해 공역(貢役)을 부담하는 계층이었다.


즉 양천제(良賤制)라는 신분구조 하에서 백성은 양인에 속했지만 지배계급으로서의 양반(兩班)과 구별되는 피지배계층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된 것이다.


조선 후기 이후 반상(班常)의 구별이 심화되면서 백성은 양반에 대칭되는 상민으로서 이러한 경향이 고착됐다.

 

오늘의 한자

 

黔 : 검을 검, 首 : 머리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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