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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2-10 15:4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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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22계 관문착적(关门捉贼) 문을 잠그고 도적을 잡다.

 

관문착적은 36계 중 제22계로 역적을 한 곳으로 몰아 포위해 죽이는 방법으로 이는 마치 닭장을 잠그고 닭을 잡는 것과 같은 것으로 손빈은 이 계략을 이용하여 내란을 평정하고 제나라 군대를 재 충전할 시간을 확보한다.

 

조(趙)나라 혜문왕이 죽고 그 아들 효성왕(孝成王)이 즉위한 7년 후 진(秦)나라와 조나라 군대가 장평(長平)에서 마주쳤는데 그때는 조사(趙奢)도 죽고 인상여(藺相如)도 병이 무거웠으며 오직 염파(廉頗)만이 나라를 지키고 있었다.

 

조나라는 염파를 장군에 임명해 진나라 군대를 치게 했으나 염파는 자주 패했으며 염파의 군대는 방벽을 굳게 지키기만 할 뿐 싸우려 하지 않았고 진나라 군대가 여러 차례 도전해 와도 염파는 끝내 응전하지 않고 굳게 지키기만 했다.

 

진나라는 이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조나라의 명장 염파를 제거하지 않으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염파를 제거하기 위해 첩자를 풀어 심리전을 펼쳤는데 “진나라가 걱정하는 것은 마복군(馬服君) 조사의 아들 조괄(趙括)이 장군이 되는 것”이라는 소문을 내 조나라 왕은 염파를 파면하고 조괄을 장군으로 삼았는데 인상여가 반대했다.

 

인상여는 “왕께서는 이름만으로 조괄을 쓰시려고 하는데 그것은 거문고 기러기발을 풀로 붙여 둔 채 거문고를 타려는 것과 같아 조괄은 다만 그의 아버지가 남긴 병법에 관한 전적(典籍) 혹은 저작(著作)을 읽은 것뿐으로 임기응변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왕은 듣지 않고 조괄을 장군으로 임명했는데 조괄은 소년 시절부터 병법을 배워 군사에 관한 이야기를 잘했고 천하에 병법가로서는 자기를 당할 사람이 없다고 자부했는데 일찍이 그의 아버지 조사도 함께 병법을 토론했을 때 조괄을 당해 내지 못했으나 조사는 아들을 칭찬한 적이 없었으며 조괄의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묻자 조사는 “전쟁이란 죽음의 땅인데 괄은 그것을 가볍게 말하며 조나라가 괄을 장군에 임명하는 일이 없다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그 애가 장군이 되면 조나라 군대를 망칠 자는 괄이 될 것”이라며 걱정을 했다.

 

조괄의 어머니는 아들이 출발하기에 앞서 왕에게 “처음 제가 그의 아비를 모셨을 때 마침 그의 아비는 장군이었기에 직접 먹여 살리는 부하가 몇 십명이나 됐고 친구는 몇 백명에 이르렀는데 대왕이나 왕족들에게 하사받은 상은 모조리 군리(軍吏)와 사대부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또한 출정 명령을 받은 날부터는 집안일을 전혀 돌보지 않았는데 지금 괄은 하루아침에 장군이 돼 높은 자리에 앉았으나 군리들 가운데 그를 우러러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니 왕께서 내리신 돈과 비단을 가지고 돌아와 집에다 저장하고 이익이 될 만한 땅이나 집을 매일 둘러보며 사들이곤 하는데 대왕께서는 그 아비와 비교해서 어떻다고 생각하시며 아비와 자식이 마음 쓰는 것부터가 다르니 바라건대 왕께서는 그 아이를 장군으로 보내지 날라”고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왕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고 조괄의 어머니는 혹시라도 아들이 소임을 다하지 못할 경우가 생기더라도 자신을 자식의 죄에 연루시키지 말 것을 왕에게 간곡히 부탁했고 왕은 이를 수락했다.

 

조괄은 염파를 대신하자 군령을 모조리 뜯어고치고 군리들을 전부 갈아 치우자 진나라는 이 사실을 알고 극비리에 백전노장 백기(白起)를 상장군에 임명하고 백기가 장군이 된 사실을 발설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고 공포했다.

 

백기는 조나라의 군대를 한곳으로 모아 완전히 섬멸시킬 작전을 세우고 장벽(長壁)을 쌓아 진지를 구축했는데 바로 조나라 군대를 이곳까지 유인 몰살시키자는 관문착적(關門捉賊 문을 닫아걸고 도둑을 잡다)의 계책이었다.

 

조괄은 도착하자마자 마치 기선을 제압이라도 하려는 듯이 군대를 끌고 나와 진나라 군대를 쳤고 진나라 군대는 거짓으로 패해 달아나며 두 곳에 복병을 배치해 조나라 군대의 뒤를 끊게 했으며 조괄의 조나라 군대는 몇 번의 승리에 자만해 계략인 줄도 모르고 득의양양 승세를 몰아 달아나는 진나라 군대의 뒤를 쫓아 백기가 구축해 놓은 장벽까지 추격했으며 백기의 예상대로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이때 진나라의 복병 중 2만5000의 군사가 조나라 군대의 배후를 끊고 또 다른 5000의 기병이 조나라 군대와 선발대의 사이를 끊어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고 계속되는 진나라 군대의 맹공으로 퇴로를 차단당한 조나라 군대는 그 자리에 진지를 구축하고 공격에서 수비로 전환하고 구원병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진나라 소왕(昭王)은 이 소식을 듣자 몸소 하내(河內)로 거동해 그곳 주민들에게 벼슬을 내리거나 진급을 시킨 다음 15세 이상의 장정들을 전원 징발해 장평으로 보냈는데 이들의 임무는 조나라의 원군을 막아 식량 보급을 계속 차단하는 것이었다.

 

조나라 군대는 46일 동안 포위돼 있었으며 보급을 받지 못한 지가 오래돼 식량이 떨어지자 조나라 군대는 급기야 몰래 서로 죽여 사람 고기를 먹고 버티는 형국에 이르렀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조괄은 마지막으로 직접 정예부대를 앞세우고 포위망을 뚫기 위해 선두에 서서 싸웠으나 진정 장한 것은 의기(意氣)뿐 조괄은 분전 끝에 진나라 병사의 활에 맞아 죽고 말았다.

 

조괄의 군사 40만명은 전원 무장을 해제하고 백기에게 항복했으며 백기는 이번 기회에 후환을 없애 버리겠다는 생각으로 항복한 조나라 군사를 속임수를 써서 모두 구덩이에 처넣어 죽여 버리고 어린 아이 240명만을 남겨 조나라로 돌려보냈는데 BC 260년의 일이었다.

 

조괄의 어머니는 벌을 받지 않았는데 조왕이 앞서의 약속을 지킨 것으로 조나라는 이 몇 차례의 싸움에서 무려 45만이나 되는 군사를 잃었다.

 

이듬해 진나라는 다시 조나라를 공격해 수도 한단을 포위했지만 조나라가 당장 망할 운명은 아니었는지 초나라와 위나라의 도움으로 겨우 위기를 넘겼으며 그 후에도 상당 기간을 버티다가 BC 228년에 진나라의 장군 왕전(王翦)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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