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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2-10 15:5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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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23계 원교근공(远交近攻) 먼 나라와 사귀고 이웃 나라를 공격한다.

 

원교근공은 제23계로 원교는 먼 나라와 동맹을 맺고 이웃 나라를 공격한다는 뜻으로 춘추전국시대 제후들은 이 계략을 사용해 적국의 동맹을 와해시키고 각개격파하여 세력을 확장 했다.

 

전국시대 후기에 모사 범휴가 전대의 모략을 정리하고 진 왕을 설득할 때 원교근공을 제시했는데 이 계략은 이렇게 해서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손빈은 원교근공으로 진과 한 등의 국가와 동맹을 맺고 국내 반란을 진압하여 수동적인 난국을 타개한다.

 

전국시대 위(魏)나라 사람 범수(范睢)는 위나라 중대부 수가(須賈)를 섬겼으나 오해를 받아 억울하게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장록(張祿)으로 이름을 고치고 진(秦)나라로 들어갔다.

 

당시 진나라의 소왕(昭王)은 재위 36년이나 됐지만 여전히 실권을 가지지 못했고 소왕의 어머니 선태후(宣太后)와 그녀의 동생인 양후(穰侯)와 화양군(華陽君) 그리고 소왕의 동생들인 경양군(涇陽君)과 고릉군(高陵君)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

 

양후는 재상으로 있으면서 국정을 전횡했고 나머지 세 사람은 번갈아 가며 군사권을 장악했으며 범수는 진나라에서 1년이란 세월을 특별한 일 없이 허송했지만 소왕의 근심거리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의 주변에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게 됐다.

 

그러던 차에 범수가 기다리던 기회가 왔는데 당시 양후는 연(燕), 초(楚), 한(韓), 조(趙), 위 등 다섯 나라와 연합해 제(齊)를 격파하고 소왕에게 도읍(陶邑)을 봉지로 받았는데 도읍은 제나라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하여 양후는 한나라와 위나라를 지나 제나라의 강(剛)과 수(壽)를 쳐서 점령하고 이곳을 봉지로 받아 자신의 세력을 확대할 계획을 세웠다.

 

범수는 이 소식을 듣고 소왕에게 상서를 올려 이궁(離宮)에서 독대할 기회를 얻었고 소왕이 범수에게 여러 차례 가르침을 청하자 범수는 비로소 입을 열어 소왕에게 원교근공의 계책을 설명했다.

 

양후가 한과 위 두 나라를 지나 제나라의 강과 수를 친다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며 적은 군사로는 제나라를 이길 수 없고 많은 군사를 보내면 진나라에 해가 되니 신이 왕의 계책을 생각해 보니 군사를 적게 내고 한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를 동원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이는 의가 아니며 지금 동맹국인 제나라와 친하지 않다고 남의 나라를 넘어가 공격하는 것이 옳겠는가?

 

그 계획에는 허점이 많으며 지난날 제나라의 민왕(涽王)이 남쪽으로 초나라를 공격해 군대를 깨뜨리고 장군을 죽여 영토를 천 리나 넓히려고 했지만 제나라는 척촌의 땅도 얻지 못했는데 어찌 땅을 얻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겠습니까.

 

형세가 땅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으로 제후들은 제나라가 지치고 왕과 신하 사이가 불화한 것을 보고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크게 깼으므로 장수는 욕을 당하고 군사들은 꺾이고 말았으므로 제나라가 크게 깨진 까닭은 초나라를 쳐 한나라와 위나라를 살찌게 만들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이른바 적에게 군대를 빌려 주고 도둑에게 양식을 보내 준 것이라 하겠다.

 

 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략하는 것이 나으며 한 치의 땅을 얻으면 전하의 촌토가 되고 한 자의 땅을 얻으면 전하의 척지가 되니 지금 이를 버리고 멀리 있는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말했다.


소왕은 범수의 계책을 받아들였으며 범수를 객경으로 삼았고 그 후 소왕의 신임을 얻은 범수는 재상이 돼 응후(應侯)에 봉해졌고 그의 원교근공 계책은 천하 통일을 지향하는 진나라의 국시가 됐는데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과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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