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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2-10 16: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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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32계 공성계(空城计) 비어있는 성으로 유인하다.

 

빈 성으로 유인하는 공성계는 제32계로 성을 방어할 능력이 없을 때 적으로 하여금 매복을 의심하여 전진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손빈은 이 계략으로 위의 선발부대를 철군 시키고 성고의 위기를 모면하자 뒤이어 방연의 대군이 성고를 포위 한다.

 

곽충이 말하는 세 번째 일인 곽충삼사(郭沖三事)에는 제갈량(諸葛亮)이 양평(陽平)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위연(魏延)에게 정예병을 이끌고 동쪽을 향해 진공하게 하고 제갈량 자신은 만 명만 남겨 성을 지키고 있었다.

 

진선제(晉宣帝 사마의(司馬懿))가 20만의 군사를 이끌고 제갈량에 대항했는데 진군하는 도중 위연과 길이 엇갈려 비켜 가게 됐으며 제갈량이 있는 양평에서 60리 떨어진 곳에서 정찰병이 사마의에게 제갈량의 성안에 있는 병력이 적고 약하다고 보고했다.

 

제갈량 역시 사마의가 눈앞에 와 있으니 위연의 부대로 가자니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며 되돌아 사마의의 군대를 쫓자니 세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으며 장병들은 모두 대경실색하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제갈량은 태연자약하게 군중에 명령을 내리기를 깃발을 내리고 북을 울리지 말고 함부로 장막을 벗어나지 말며 성문 네 개를 모두 열어 바닥을 쓸고 물을 뿌리라고 했다.

 

사마의는 제갈량이 신중하다고 평소에 말하곤 했는데 기세가 약한 것을 보고 복병이 있으리라 의심해 군사를 이끌고 북쪽 산길로 철수했다.

 

다음 날 식사 때에 제갈량은 부하들에게 박장대소를 하며 “사마의는 분명 내가 겁이 많다고 말하면서 복병이 있는 줄 알고 산으로 달아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 제갈량전(諸葛亮傳)의 촉기(蜀記) 조량오사은몰불문어세자(條亮五事隱沒不聞於世者, 곽충오사(郭沖五事)를 인용한 배송지(裵松之) 주(注)에 나온다.

제갈량은 제1차 북벌에 앞서 후주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리고 출병을 해 면양(沔陽)에 주둔하는데 이 기록에 대한 주에 위의 내용이 나오고 이 이야기에서 공성계가 유래했는데 배송지는 이 곽충삼사를 인용한 후 난왈(難曰)을 달아 이에 대한 회의를 표시했다.

 

양평은 한중(漢中) 땅에 있는데 제갈량이 처음 양평에 주둔할 때 선제(사마의)는 형주도독으로 완성(宛城)에 주둔했고 조진이 죽은 후에 비로소 관중(關中)에서 제갈량과 대치했다.

 

    위나라가 선제를 완성에서 서성(西城)으로 파견해 촉나라를 정벌하게 했을 때 마침 장마철을 만나 일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때를 전후해서는 더 이상 양평에서 교전한 일이 없었다.

 

    곽충의 말대로 선제가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고 제갈량의 병력이 적고 약했다면 설령 복병이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하더라도 방비책을 마련해 신중하게 했어야지 도망갈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이 책에서 인용한 것은 모두 거짓이다.

 

곽충삼사는 곽충의 조량오사은몰불문어세자, 즉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제갈량의 일화 다섯 가지 중에서 세 번째에 해당한다.

 

참고로 곽충오사를 요약하면

 

제1사. 제갈량이(익주에서) 형법을 준엄하게 시행해 모든 사람들이 불평을 하자 법정(法正)이 이를 간했고 제갈량은 형법을 엄정하게 시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에 대해 배송지는 “제갈량이 실권을 잡고 익주를 다스리기 시작한 것은 유비가 이릉(夷陵)의 전투에서 오나라에 대패하고 백제성에 머물다가 죽은 후부터였고 법정은 유비보다 먼저 죽었으므로 법정이 제갈량의 준엄한 형정에 대해 간했다는 사실은 그 신빙성이 높지 않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제2사. 조조가 유비에게 자객을 보냈는데 자객이 유비와 대면해 위나라를 정벌할 계책을 제시하며 유비와 가까워지려 했는데 그의 행동거지를 본 제갈량이 그가 조조가 보낸 자객임을 간파하자 담을 넘어 도망하고 말았다.

 

이에 대해 배송지는 “유비는 사람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인데 이 자객에게 혹했다면 이 사람은 분명 제갈량에 버금가는 일세의 기인일 것인데 그런 기인이 왜 자객으로 파견됐을까? 더구나 이 사람이 죽지 않았으니 위나라에서 대단한 지위에 올랐을 텐데 그에 대한 아무런 후일담도 없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제3사. 공성계.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다.

 

제4사. 제갈량이 기산(祁山)에 진출해 농서(隴西), 남안(南安)을 항복시키고 천수(天水)를 포위하고 기성(冀城)을 함락시키고 강유(姜維)를 포로로 잡고 약탈당한 남녀 수천 명을 촉 땅으로 되돌려 보내자 사람들이 모두 제갈량에게 축하의 인사를 했다.

 

그러자 제갈량은 한 사람이라도 죽는 것은 모두 자신의 죄인데 이런 일로 축하를 받으니 부끄럽다고 말하자 촉나라 모든 사람들은 이로써 제갈량이 영토를 넓힐 뜻이나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위나라를 삼킬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됐다.

 

이에 대해 배송지는 “제갈량이 위나라를 삼키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주 오래된 사실로 사람들이 이때 비로소 알게 된 것이 아니며 또한 군대를 동원했지만 이룬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상을 당했으며 세 군이 항복했지만 얻은 것도 없고 강유는 천수 땅의 필부일 뿐으로 얻었다고 해도 위나라에 아무런 손실이 되지 않았으며 서현(西縣)의 천호를 빼앗았다고 해도 가정(街亭)에서의 손실이 벌충되지 못하는데 무슨 공이 있다고 촉나라 사람들이 축하를 했겠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제5사. 위명제(魏明帝)가 선왕(宣王 사마의)을 보내 장합(張郃)의 군대와 옹(雍)과 양(凉) 지역의 군사 30여만을 통솔해 비밀리에 검각(劍閣)으로 진격하게 했는데 당시에 제갈량은 기산에 있었는데 병사들을 본국에서 출발한 군사들과 교대해 주기로 했는데 위의 대군이 진격해 오자 참모들이 병사들을 1개월만 더 머무르게 하자고 건의했고 제갈량은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병사들을 돌아가도록 하자 병사들이 모두 감격해 남아서 일전을 치르기를 원했고 이 싸움에서 촉군은 대승을 거두고 위의 장군 장합을 죽였다.

 

이에 대해 배송지는 “제갈량의 대군이 관중 농서에 있었는데 위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제갈량의 군대를 넘어 검각으로 갈 수 있었겠으며 제갈량은 원래 전쟁터에서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는데 어째서 군사를 교대해 촉으로 돌려보냈겠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곽충오사는 삼국지의 본문에는 인용되지 않았으며 삼국지의 배송지 주와 삼국연의에서는 인용됐는데 그 사실의 신빙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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