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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정면 동산1리, 정월대보름 맞이 각종 행사 풍성
편집국 편집장
2018-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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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복격양(鼓腹擊壤)
고복격양(鼓腹擊壤)은 배를 두드리고 발을 구르며 흥겨워 한다는 뜻으로 백성들이 태평세월을 누린다는 뜻으로 십팔사략(十八史略) 제요편(帝堯篇)과 악부시집(樂府詩集) 격양가(擊壤歌)와 사기(史記) 오제본기편(五帝本紀篇)에서 볼 수 있다.
유가(儒家)는 성군(聖君)의 표상(表象)으로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을 꼽는데 두 임금의 치세는 아직 고증이 되지 않아 신화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으나 공자나 맹자 같은 성인이 가상이나 전설의 인물을 그토록 받들고 거론했겠느냐는 반론이 있다.
천하(天下)의 성군(聖君)으로 꼽히는 요 임금이 천하를 통치한지 5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자신의 통치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평복으로 거리에 나섰는데 어느 네거리에 이르자 어린 아이들이 손을 맞잡고 요임금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입아증민(立我烝民) 우리가 이처럼 잘 살아가는 것은
막비이극(莫匪爾極) 모두가 임금님의 지극한 덕이네
불식부지(不識不知)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순제지칙(順帝之則) 임금님이 정하신 대로 살아가네
요 임금은 어린이들의 순진한 노랫소리에 기분이 매우 좋았고 마음이 흐뭇해진 요 임금은 어느 새 마을 끝까지 걸어갔다.
그곳에는 머리가 하얀 한 노인이 우물우물 무언가 씹으면서 손으로 배를 두드리고 발로 땅을 구르며(鼓腹擊壤)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일출이작 일입이식(日出而作 日入而息)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네
경전이식 착정이음(耕田而食 鑿井而飮) 밭을 갈아 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니
제력하유우아제(帝力何有于我哉) 임금님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요.
백발노인의 고복격양(鼓腹擊壤)에 요 임금은 정말 기뻤다.
백성들이 아무 불만 없이 배를 두드리고 발을 구르며 흥겨워하고 정치의 힘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으니 그야말로 정치가 잘 되고 있다는 증거였으며 이 노래의 내용은 요 임금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정치였다.
다시 말해서 요임금은 백성들이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스스로 일하고 먹고 쉬는 이른바 무위지치(無爲之治)를 바랐던 것이다.
요임금의 덕택이다, 좋은 정치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보다 그 노인처럼 백성이 정치의 힘을 의식하지 않고 즐겁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이상적인 정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요임금은 자신이 지금 정치를 잘 하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도교(道敎)의 창시자 노자(老子)도 이런 정치를 두고 무위(無爲)의 치(治)라고 했으며 정치론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리고 요 임금처럼 지배자가 있는지 없는지를 모를 정도로 정치를 잘하는 지배자를 최고의 통치자로 꼽았다.
격양(擊壤)은 나무로 만든 신 모양의 양(壤)을 땅에 세워놓고 떨어진 곳에서 다른 양을 던져서 격(擊) 맞추는 놀이라는 설과 흙으로 만든 악기를 타는 일이라는 설이 있다.
오늘의 한자
鼓 : 두드릴 고, 腹 : 배 복, 擊 : 칠 격, 壤 : 부드러운흙 양
편집국 편집장
2018-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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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할머니 모십니다"
[굿타임] = 이강부 기자 = 충남도는 다음 달 16일까지 제10기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사업 참여 희망자를 모집한다.
도와 한국국학진흥원이 함께 추진하는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사업은 할머니들이 유치원과 어린이집 등 유아 교육 기관을 방문해 옛날이야기나 미담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사업은 100세 시대를 맞아 할머니들에게 보람 있고 품격 높은 사회 참여 기회를 제공하고 유아들에게는 이야기를 통한 올바른 인성 형성을 돕기 위해 지난해까지 이야기할머니 127명을 선발 도내 277개 유아기관에 파견해 사업을 추진해 유아 인성 함양과 여성 노령 인구 삶의 질 개선에 힘 써 왔다.
올해 신규 선발하는 이야기할머니는 만 56세부터 만 70세까지의 할머니로 유아에 대한 관심과 애정만 있다면 학력에 관계없이 누구나 지원 가능하다.
도는 응모자에 대한 서류 심사와 면접 등을 거쳐 오는 5월 최종 합격자를 발표할 계획이며 최종 합격자는 신규와 월례 교육 등 9개 과정을 수료한 후 내년부터 주2회 씩 도내 유아기관에서 이야기할머니로 활동하게 된다.
도 관계자는 “이야기할머니 사업은 미래 세대에게 한국적 정서가 담긴 이야기를 보급함으로써 민족문화 전승 기반 구축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편집국 편집장
2018-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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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디스플레이, 발달장애 아동 청소년 특별한 재능 응원
편집국 편집장
2018-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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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창, 관악이 함께 가는 ‘빈에서 프라하까지’
편집부
2018-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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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시중앙도서관, 상반기 문예창작교실 수강생 모집
[굿타임] = 이강부 기자 = 아산시중앙도서관은 2018년 독서진흥사업의 일환으로 상반기 문예창작교실을 운영한다.
상반기 문예창작교실은 3월 13일부터 5월 22일까지 11주간 운영되며 아산시민을 대상으로 총20명의 성인 수강생을 모집한다.
또 강의를 저녁시간인 오후 7시부터 9시에 개설함으로써 낮 시간에 도서관 이용이 어려운 직장인 등의 편의를 고려했다.
문예창작교실의 강의는 시란 무엇인가?, 시 읽고 생각 나누기, 메시지 전달과 형상화, 습작시 쓰기 등의 다양한 주제로 진행되며 마지막 11주차에는 문학 박사의 특강이 진행될 예정이며 강의의 최종 목표는 아산시민들이 직접 현대시를 창작해보는 것이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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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후주(枯木朽株)
쓰이지 못한 사람이나 물건(物件)을 비유한 고목후주(枯木朽株)는 사기(史記) 노중련(魯仲連) 추양열전(鄒陽列傳)에서 볼 수 있다.
서한(西漢) 경제(景帝) 유계(劉啓)가 재위하던 시절 추양(鄒陽)이라는 유명한 학자가 있었는데 그는 엄기(嚴忌)와 매승(枚乘) 등과 함께 오왕(吳王) 유비의 수하에서 벼슬을 하게 됐는데 그들은 모두 뛰어난 문장력과 언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용됐다.
후에는 오왕양이 반란을 꾀하자 추양은 이를 따르지 않고 곧 간언하는 글을 올렸다.
오왕 유비가 이러한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자 추양은 엄기, 매승 등과 함께 양(梁)나라 효왕(孝王) 유무(劉武)에게 귀순했다.
양 효왕의 심복인 양승(羊勝)과 공손궤(公孫詭) 등은 추양의 재능을 시기해 효왕의 면전에서 추양을 중상하자 양 효왕은 크게 노해 곧 추양을 감옥에 가두고 사형에 처할 준비를 했다.
추양은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감옥에서 양 효왕에게 글을 올려 자신의 결백을 스스로 변호했다.
추양은 자신의 글에서 많은 역사적 인물들을 열거하면서 의심을 받고 신임을 얻지 못했던 이들이 모두 충정지사(忠貞之士)였음을 밝혔다.
그는 양 효왕에게 사실을 정확히 살펴 인재가 억울함을 당하지 않고 중용(重用)될 수 있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
추양은 형가(荊軻)가 연나라의 태자 단(丹)을 위해 진나라 왕을 죽이려다 실패해서 그의 일족이 연루돼 죽게 된 일과 오 나라 왕 합려가 왕자 경기를 죽이려 하자 오왕의 신하 요리가 자기의 처자를 태워 죽인 것 등을 예로 들면서 글을 이어 나갔다.
저는 명월주(明月珠)나 야광의 벽(璧)도 어두운 길을 사람에게 던지면 칼을 잡고 노려보지 않는 사람이 없을 것인데(明月之珠, 夜光之璧, 以闇投人于道路, 人無不按劍相眄者) 이는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그것은 아무 내력도 없는 것이 눈앞에 날아왔기 때문이며 구부러진 나무뿌리가 서리고 굽고 뒤틀어졌지만 만승 군주의 기물(器物)이 될 수 있는 것은 좌우의 사람들이 그 뿌리를 조각하고 장식을 해 군주에게 바치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인연도 없는데 눈앞에 날아오면 천하제일인 수후(隋侯)의 주(珠)나 야광의 벽일지라도 원한만 살 뿐 덕으로 여기지는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미리 알려 준 바라면 마른 나무나 썩은 등걸을 바치더라도 공로가 있다 해서 잊여지지 않게 되는 것(故有人先談, 則以枯木朽株樹功而不忘)입니다.
지금 군주들은 천하의 식견과 기량이 위대한 선비들을 군왕의 권력의 무게에 짓눌리게 하고 세력 있는 벼슬만을 최고로 여기어 얼굴빛을 온화하게 하고 행실을 더럽혀 가면서까지 아첨하기를 좋아하고 있어 뜻 있는 선비들은 차라리 험한 동굴 속에 숨어 엎드려 죽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내용의 글이 양 나라 효왕에게 바쳐지자 효왕은 사람을 보내서 추양을 옥에서 석방하고 상객(上客)으로 대우했다.
오늘의 한자
枯 : 마를 고, 木 : 나무 목, 朽 :썩을 후, 株 : 그루 주
편집국 편집장
2018-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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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아 뛰어라, 문화야 놀자”
편집국 편집장
2018-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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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황실조(驚惶失措)
직역하면 놀라 허둥대며 어쩔 줄을 모른다는 뜻으로 황(惶) 대신 황(慌 어렴풋할 황)을 쓰기도 하며 북제서(北齊書) 원휘업전(元暉業傳)에서 볼 수 있다.
북제서(北齊書)는 수(隋)나라의 이백약(李百藥)이 636년에 편찬한 북제(北齊)의 역사로 본기(本紀) 8권과 열전 42권 등 모두 50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중국 25사(史)의 하나로 북제(北齊)는 동위(東魏)의 승상 고환(高歡)의 아들인 고양(高洋)이 세운 중국의 왕조(550∼577)로서 남제(南齊)와 구별해 북제라고 한다.
남북조 시대 북위(北魏)의 경목(景穆) 황제에게는 원휘업(元暉業)이라는 고손자(高孫子)가 있었는데 그는 어려서는 행동이 난잡해 강도나 도적들과 내왕했으나 나이가 들어서는 과거의 습관을 고치고 널리 경전(經典)과 사서(史書)들을 섭렵하고 글을 썼는데 훗날 역사서에서는 이러한 그의 모습을 지조(志操)와 절개(節槪)가 있다고 평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위(魏)나라 종실(宗室)에는 원소(元韶)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위나라 효장제(孝莊帝)의 조카로서 연약해 기골(氣骨)이 없는 자였다.
북제(北齊)가 위나라를 멸한 후 제나라 신무제(神武帝)가 위나라 효무제의 황후를 자기에게 시집오게 하자 위나라 황실에서는 많은 보석들을 황후 편에 그의 집으로 딸려 보냈는데 훗날 원소는 옥새(玉璽)를 제나라 황제에게 바쳤다.
제나라 선제(宣帝)는 원소의 수염을 자르고 그에게 여자 화장을 시켜 그를 비웃었지만 원소는 말없이 받아들였다.
어느 날 원휘업는 문선제(文宣帝)를 따라 진양(晉陽)에 갔다가 궁문의 밖에서 원소를 만나자 참지 못하고 ‘너는 이 노파보다 못해 옥새를 남에게 주어버리다니 왜 부셔버리지 않고?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네가 죽을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며 그를 꾸짖었다.
문선제는 원휘업의 말을 듣고 즉각 원휘업과 위나라 태무제의 손자 원효우(元孝友)까지 죽이라고 명했다.
형이 집행되려고 하자 원효우는 놀라서 어쩔 줄 몰랐으며 원휘업은 실색(失色)해 사형에 응했고 두 사람의 시체는 강물의 얼음을 깨고 그 속에 버려졌다.
원소는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했지만 그 결과는 좋지 않았으며 원휘업이 죽은 지 8년 후 원소는 다른 원씨 19가구와 함께 감옥에 갇혀 굶어죽었다.
오늘의 한자
驚 : 놀랄 경, 惶 : 두려워할 황, 失 : 잃을 실, 措 : 둘 조
편집국 편집장
2018-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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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시, 제99주년 3‧1절 기념식
편집부
2018-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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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시립합창단, 미국 합창음악 거장 Ethan Sperry와 만나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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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청즉명(兼聽則明)
여러 방면의 의견(意見)을 들으면 옳고 그름이 밝혀진다는 뜻의 겸청즉명(兼聽則明)은 자치통감(資治通鑒) 당기(唐紀) 태종 정관(太宗 貞觀)에서 볼 수 있다.
당(唐)나라 태종(太宗)때 위징(魏徵)이라는 유명한 정치가가 있었는데 그는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나 생활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절에 들어가 생활하다가 후에는 군에 입대해 관리가 됐으며 그의 벼슬은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이르렀다.
위징은 매우 명석한데다가 역사에 정통했기 때문에 항상 당 태종에게 여러 가지 계책을 제공하며 그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당태종이 제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던 어느 날 당태종은 그에게 ‘나라의 군주로서 어떻게 해야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으며 일을 잘못 처리하는 경우 그 원인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위징은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다 들어보면 자연스럽게 정확한 결론을 얻을 수 있지만 만약 한쪽 말만 듣고 그것을 믿는다면 일을 잘못하게 될 것’(兼聽則明, 偏信則暗)이라고 말했다.
위징은 이어서 역사적 교훈을 예로 들면서 군주가 한쪽의 말만 듣고 한쪽의 말만 믿는 것이 얼마나 큰 잘못된 결과를 초래하는지 대해 ‘진(秦)나라 이세는 조고의 말만을 믿다가 멸망하게 됐고 양(梁)나라 무제는 주이(朱異)만을 믿다가 스스로 굴욕을 당하게 됐으며 수(隋)나라 양제는 우세기(虞世基)만을 믿다가 고성각(鼓城閣)의 변을 초래했다“고 말했다.
또 “이와 반대로 상황을 더 많이 이해하고 더 많은 의견을 듣는다면 이러한 재화(災禍)는 막을 수도 있고 피할 수도 있으며 예컨대 요 임금은 자주 백성들을 찾아다니며 물었기 때문에 묘(苗)라는 나쁜 사람의 일에 대해 분명하게 알 수 있었고 순 임금은 눈과 귀가 밝았기 때문에 공공(共工)이나 곤, 환두(驩兜) 등의 잘못된 행동이 빠져나가지 못했듯이 명철하고 지혜로운 군주는 언로(言路)를 막지 않으며 아래 사람들의 상황을 위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게 함으로써 비로소 정확한 결정을 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위징의 말을 듣고 당태종은 그의 식견에 감탄하며 그를 더욱 존경하게 됐다.
오늘의 한자
兼 : 겸할 겸, 聽 : 들을 청, 則 : 곧 즉, 明 : 밝을 명
편집국 편집장
2018-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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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되살아난 민족혼-민족기록화 展
편집국 편집장
2018-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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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임이 들려주는 봄의 소리, 행복드림 콘서트
편집국 편집장
2018-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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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 3·1절 맞아 정완진 애국지사 위문
편집국 편집장
2018-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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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애(兼愛)
모든 인간을 똑같이 사랑함을 지칭하는 겸애(兼愛)는 묵자(墨子) 겸애편(兼愛篇)과 맹자(孟子) 진심(盡心) 상편(上篇), 묵자(墨子) 천도편(天道篇)에서 볼 수 있다.
자기와 남을 구별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자신에 대해서와 같이 사랑한다면 이 세상에 다툼은 없어지고 인간은 평화로운 생활을 누릴 수가 있어 천하의 큰 이로움(天下之大利)이라고 주장한 전국시대 주(周)나라의 사상가 묵자(墨子)의 교설(敎說)이다.
겸애는 묵자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하늘의 뜻 천의(天意)에서 나온 것이라 해 도덕상의 당위(當爲)로서 인간에게 지워진 의무라 했으며 그의 정치 도덕에 일관하는 최고 원리다.
묵자(墨子) 겸애편(兼愛篇)에 묵자가 말하기를 ‘남의 나라 보기를 내 나라와 같이 하고 남의 집 보기를 내 집을 보는 것과 같이 하고 남의 몸 보기를 제 몸 같이 하라’(視人之國若視其國 視人之家若視其家 視人之身若視其身)고 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고 이롭게 하듯이 사람들도 서로 사랑하고 이롭게 해야 한다는 겸애교리설(兼愛交利說)은 바로 묵자와 같은 신(神)을 믿는 종교인에게서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이와 같은 묵자의 겸애교리설에 대해 시경(詩經)에서 남을 사랑하면 반드시 남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남을 미워하면 반드시 남으로부터 미움을 받는 법이라 한 것과 일치한다.
맹자(孟子) 진심(盡心) 상편에서 ‘묵자는 겸애를 머리 꼭대기에서 발뒤꿈치까지 닳더라도 천하에 이가 되면 이를 한다(墨子兼愛 摩頂方踵 利天下爲之)고 평가했다가 나중에는 겸애설을 ’아비를 업신여기고 군왕을 업신여기는’(無父無君) 사상이라 해 심하게 공격했다.
묵자는 천도편(天道篇)에서 겸애는 사심(私心)이 없으니 바로 어질고 의로운 마음(兼愛無私此仁義之情也)이라고 해 공자(孔子)의 인애(仁愛)를 차별해 질서를 중시하고 가족을 중심으로 한 폐쇄된 생활공동체에 대한 사랑이라 해 이를 반대했다.
천하의 해(害)를 제거하고 천하의 이(利)를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인자(仁者)의 사명이다.
강자가 약자를 협박하고 다수가 소수를 업신여기고 사이비 군자가 국민을 기만하고 군주가 횡포를 부리고 신하가 불충을 저지르며 부모가 애정이 없는 것 자식이 효성을 다하지 않는 것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천하의 해는 남을 증오하고 남에게 불이익을 주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러한 사상을 하나의 이상으로서만 인정되고 있을 뿐 현실적으로는 유가(孺家)의 사상이 이 사회에서 뿌리를 박고 있다.
겸애설(兼愛說)은 중국 전국시대의 사상가 묵적(墨翟)과 그 주장을 신봉하는 학파인 묵가(墨家)의 대표적인 주장을 말한다.
중국의 전국시대 때 묵가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듯이 남을 사랑하고 자기 집과 자기 나라를 사랑하듯이 다른 나라를 사랑하면 천하가 태평하고 백성이 번영하는데 이는 단순히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늘의 뜻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은 신분계급이 엄격했던 당시로서는 충격적인 주장이었으며 이러한 교설은 유가(儒家)에서 주장하는 인애(仁愛)와 비슷하나 유가의 그것이 부자(父子) 군신(君臣)이라는 관계를 중시하고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차례로 멀리 미치는 것임에 비해 묵가의 그것은 이러한 가깝고 먼 것의 구별보다는 자기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만인을 사랑하라고 주장한 점이 크게 다르다.
이 때문에 맹자(孟子)로부터 아버지나 임금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비난받았다.
오늘의 한자
兼 : 겸할 겸, 愛 : 사랑 애
편집국 편집장
2018-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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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트폭력 사랑이 아닌 범죄입니다.
작년 7월 서울 신당동에서 20대 남성이 여자친구를 무참히 폭행하는 사건이 있었다.
길 한복판에서 남성이 여성을 향해 무차별적인 주먹질을 하였고 쓰러진 여성에게 지속적으로 발길질을 하였다.
또한 인근에 세워진 차량으로 도망가는 여성을 뒤따라가 생명을 위협한 것도 모자라 여성을 대피시켰던 주변 시민들까지 위협하면서 언론에 보도된 사건이다.
지구대에서 근무하다보면 ‘연인에게 폭행을 당했다’라는 신고를 드물지 않게 접하고 있다.
폭행은 사람에 대한 것이든, 물건에 대한 것이든 모든 종류의 유형력 행사를 말한다.
이 단어가 이제는 남녀관계라는 데이트와 접합되어 사용된다.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우리 일상 속에서 물리적인 신체적 폭력 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폭력 없이도 연인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는 것 역시 데이트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애인의 옷차림, 헤어스타일 등 모든 부분을 결정하고, 자신 외에 누구도 허락할 수 없는 인간관계 관리 등 이에 속한다.
어떻게 보면, 이런 것까지 데이트폭력일까 싶지만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고 사소하게 넘어갔던 것들이 모두 데이트 폭력이었던 것이다
최근 서울시에서 20세 이상 660세 이하 여성 2천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데이트폭력 피해실태 통계에 의하면 88.5%가 데이트폭력을 경험하였다고 한다.
특히 신체적 폭력 부분에서 팔목이나 몸을 힘껏 움켜잡는 경우가 35%로 가장 많았으며, 심하게 때리거나 목을 조르는 경우가 14.3%, 상대의 폭행으로 인해 병원치료 받은 경우가 13.9%, 칼(가위) 등의 흉기로 상해가 11.6% 등 폭력의 정도가 심한 경우도 10%를 넘었다.
이 통계로 볼 때 데이트폭력을 결코 쉽게 간과해서는 안되며 더 심한 경우에는 살인 등 강력범죄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이에 아산경찰서는 사회적 약자보호 3대 치안정책으로 ‘연인간 데이트폭력 사건 엄정 대응’계획을 실행하고 있으며 연인간 관계 불개입 등 소극적 태도를 견지하고 상황에 맞는 판단하에 형사입건 및 (긴급)임시조치 활성화로 신고자 및 피해자 등에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보다 적극적인 초동조치로 2차 피해 예방에 중점을 둔다.
현장 경찰관은 먼저 폭력여부 확인하여 피해자 분리 및 안정에 중점을 두고 가해자에게 경고장을 배부하고 있으며 피해자의 위험성 및 여건 등을 고려하여 주변순찰강화, 신변보호, 위치추적장치대여, 등 맞춤형 신변보호를 실시하고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폭력이 정당화 될 수 있을까. 사랑이라는 가면 뒤에 숨는 것이 아니라 명백한 범죄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숨기지 않고 문제를 알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연인간 관계 형성 후 인격적 존중 및 태도에서 과도한 집착이 보일 때 ‘사랑이 아니야’라고 확실한 의사표현은 물론 경찰(112신고) 및 1366 여성긴급전화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
연인 간 관계는 한 사람의 소유물이 아닌 동등한 인격체이며 상대에 대한 희생과 배려로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해 줄 때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 아닐까 싶다.
아산경찰서 온양지구대 순경 이상희
편집국 편집장
2018-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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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스피싱 안전불감증, 남녀노소가 방심 아닌 긴장해야 할 때
편집국 편집장
2018-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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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초보은(結草報恩)
결초보은(結草報恩)을 직역하면 풀을 맺어 은혜에 보답 한다는 뜻으로 죽어서까지 라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다는 말로 죽어 혼령이 돼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음을 의미하는 결초보은(結草報恩)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傅)에서 볼 수 있으며 촉한(蜀漢)의 이밀(李密)의 진정표(陳情表)에도 인용되고 있다.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위무자(魏武子)에게 젊은 첩이 있었는데 위무자가 병이 들자 본처의 아들 과(顆)를 불러 ‘네 서모를 내가 죽거들랑 개가(改嫁) 시키도록 해라’했으나 위무자의 병세가 점점 악화돼 위독한 지경에 이르게 되자 아들 과(顆)에게 다시 분부하기를 ‘내가 죽거들랑 네 서모는 반드시 순사(殉死)케 하라’고 명했다.
그리고 위무자가 죽자 아들 과(顆)는 ‘사람이 병이 위중하면 정신이 혼란해지기 마련이니 아버지께서 맑은 정신일 때 하신 말씀대로 따르리라’하고는 아버지의 처음 유언을 따라 서모를 개가(改嫁)시켜 드렸다.
그후 진(秦)나라 환공(桓公)이 진(晉)나라를 침략해 군대를 보씨(輔氏)에 주둔시켰다.
보씨의 싸움에서 위과(魏顆)는 진(晉)의 장수로 있었기 때문에 진(秦)의 대역사(大力士) 두회(杜回)라는 장수와 결전을 벌이게 됐는데 위과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싸움터에서 한 노인이 땅에서 무성하게 자라난 풀들을 잡아매어(結草) 온 들판에 매듭을 만들어 놓아 진(秦)나라 말들이 그 풀 매듭에 걸려 쓰러지자 말에 타고 있던 진나라 병졸들은 여지없이 말 위에서 떨어져 땅에 나뒹굴었다.
위과(魏顆)는 이 때를 틈타 사나운 맹수와 같이 군대를 이끌고 총 공격을 해 싸움을 순조롭게 승리로 이끌고 적장 두회를 사로 잡았다.
그날 밤 위과의 꿈에 그 노인이 나타나 ‘나는 당신 서모의 애비되는 사람으로 그대가 아버지의 유언을 옳은 방향으로 따랐기 때문에 내 딸이 목숨을 유지하고 개가(改嫁)해 잘 살고 있으며 나는 당신의 그 은혜에 보답(報恩)하고자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때부터 결초보은(結草報恩)이란 죽어 혼백이 되어서까지 은혜를 갚는다는 뜻으로 쓰이게 됐다.
오늘의 한자
結 : 맺을 결, 草 : 풀 초, 報 : 갚을 보, 恩 : 은혜 은
편집국 편집장
2018-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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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죽사난사(擊竹事難事)
대나무를 다 사용해 써도 그의 악행을 다 쓸 수 없다는 뜻으로 필설(筆舌)로 다 할 수 없으리만큼 죄악을 저질렀다는 격죽사난사(擊竹事難事)는 후한서(後漢書) 왕망전(王莽傳)에서 볼 수 있다.
전한(前漢) 말기에 왕망(王莽)이 한(漢)나라의 평제(平帝)를 독살하고 한나라를 뺏은 다음 스스로 황제 자리에 올라 국호를 신(新)이라 부르고 왕조를 개창했다.
토지제도의 개혁에 있어 왕토사상(王土思想)을 내세워 전국의 토지를 왕전(王田)이라 해 매매를 금지시켰으며 전지(田地) 소유면적을 제한하고 지주와 호족(豪族)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쳐 3년 만에 폐지했다.
관제(官制)개혁도 행정의 원활성이 없어 관민이 모두 혼란에 빠졌으며 조정이 시장거래에 개입해 상품유통을 저해했으며 경제면에서 대혼란을 일으켰다.
한에 복속(服屬)한 군장(君長)을 후(侯)로 격하하는 등 주변 제민족(諸民族)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왕망은 백성들을 총동원해 광대한 지역에다 거대한 궁궐을 짓게 하니 가혹한 노동으로 인해 쓰러지는 백성의 수가 줄을 이었고 시체는 산을 이루자 악정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각지에서 벌떼처럼 궐기해 왕망 타도를 외치며 장안(長安)을 향해 진격을 개시했는데 이 당시 서주(徐州)의 상장군(上將軍)인 외효는 왕망타도의 격문(檄文)에서 '왕망의 죄는 초(楚)나라와 월(越)나라의 대나무를 모두 사용해도 다 쓸 수가 없을 정도'라고 말하며 농민군을 자극시켰다.
초나라와 월나라의 대나무로 만든 죽간(竹簡 대의 조각을 엮어서 만든 책)을 다 사용해 써도 그 악행을 다 적을 수가 없다는 뜻으로 여기서 초나라와 월나라는 대나무의 명산지다.
그 후 왕망은 한(漢)의 유수(劉秀)가 장안(長安)으로 진격하자 패사(敗死)했다.
왕망(王莽)은 중국 전한(前漢) 말의 정치가로 신(新) 왕조의 건국자로 자는 거군(巨君)이며 산둥(山東) 출생으로 한(漢)나라 원제(元帝)의 왕후인 왕(王)씨 서모의 동생인 왕만(王曼)의 둘째 아들로 갖가지 권모술수를 써서 사실(史實)상 최초로 선양혁명(禪讓革命)에 의해 전한의 황제권력을 빼앗았다.
왕 왕후의 아들 성제(成帝)가 즉위하자 왕망의 큰아버지 왕봉(王鳳)이 대사마대장군영상서사(大司馬大將軍領尙書事)가 돼 정치를 한 손에 쥐었다.
왕망은 불우하게 자랐으나 유학을 배웠고 어른을 잘 섬겼으므로 왕봉의 인정을 받아 황문랑(黃門郞)이 되고 봉읍(封邑) 1500호를 영유하는 신야후(新野侯)가 됐으며 그 뒤 왕씨 일족의 두령으로서 지위를 굳히고 38세로 재상이라 할 수 있는 대사마(大司馬)가 됐다.
다음의 애제(哀帝) 때에 신흥 외척의 압박을 피해 한때 정계에서 물러났으나 애제가 1년 만에 아들 없이 죽자 태황태후 왕씨와 쿠데타에 성공해 대사마에 복귀해 9세의 평제(平帝)를 옹립하고 자기의 딸을 왕후로 삼았으며 자기에게는 안한공(安漢公) 재형(宰衡)이라는 칭호를 붙여 평제의 보정자(輔政者)로서의 외관을 갖추었다.
그 뒤 평제를 독살하고 2세의 유영(劉拏)을 세워 당시 유행하던 오행참위설(五行讖緯說)을 교묘히 이용하며 인심을 모았으며 자기를 스스로 가황제(假皇帝)라 하고 신하들에게는 섭황제(攝皇帝)라 부르게 했다.
그리고 ‘안한공 왕망은 황제가 되라’는 붉은 글씨가 씌어진 흰 돌이 나타나게 하고 왕망이 황제가 되라는 하늘의 의사표시로 간주되는 새 우물을 출현시키는 연극을 벌였다.
이 신비적인 형태를 수반해 인간에게 표시되는 천명(天命)을 부명(符命)이라 하는데 왕망은 이 부명을 교묘히 이용해 유영을 몰아내 한 나라를 멸망시키고 국호를 신이라 해 황제가 됨으로써 선양혁명에 성공했다.
황제 왕망은 복고적 색채를 띤 여러 가지 번잡한 정책을 폈는데 주(周)나라 시대의 정전법(井田法)을 모방해 토지개혁을 단행했는데 이것은 지방호족의 대토지소유를 제한하고 자영농민의 빈민화를 막으려는 것이었다.
또 가난한 농민에게 싼 이자의 자금을 융자해 주는 사대제도(痂貸制度)를 두기도 했는데
이것도 사상적으로는 유교교전인 주례(周禮)에서 볼 수 있는 고전적인 것이나 화폐제도 개혁과 평준(平準) 균수(均輸) 등 여러 상공업통제책과 함께 당시의 현실이 요청하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개혁정책은 결과적으로 한 말의 여러 모순과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모두 실패했는데 강력한 중앙집권적 전제지배를 꾀한 그의 정책은 오히려 농민들에게 고통을 주었고 각지에 있는 호족들과의 이해(利害)가 상반된 점에 실패의 원인이 있었다.
그는 대외정책에도 실패해 사회혼란을 증대시켰으며 흉노(匈奴)와 서역 여러 나라가 그를 이반(離反)했고 동쪽에서는 고구려와 충돌했으며 이와 같이 내외정세가 악화된 속에서 적미(赤眉)의 난이 일어났고 각지의 농민과 호족이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다.
한나라 황족의 한 사람인 난양(南陽)의 호족 유수(劉秀)가 군대를 일으켜 이듬해 곤양(昆陽)에서 왕망의 군대를 크게 무찔렀다.
왕망은 장안(長安)의 미앙궁(未央宮)에서 부하에게 찔려 죽음으로써 건국한지 15년에 멸망하고 후한이 그 뒤를 이었다.
죽간(竹簡)은 2세기 초엽에 종이가 발명되기 전까지 가장 많이 사용된 서사재료(書寫材料)로 종이 이전의 종이라고 할 수 있으며 죽간을 만들려면 우선 대나무의 마디를 잘라낸 다음 마디 사이의 부분을 세로로 쪼갠 대나무패를 불에 쬐어 기름을 빼는데 이것은 글씨를 쓰기 좋게 하고 벌레 먹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며 길이는 20∼25cm이며 너비는 몇 cm로 한 줄밖에 못 쓰기 때문에 여러 장을 합쳐서 가죽 또는 비단으로 된 끈으로 편철(編綴)하는데 이와 같이 몇 장의 간(簡)을 편철한 것을 책(策) 또는 책(冊)이라고 불렀다.
죽간은 그 실물이 20세기에 들어와서 중국 북서쪽 볜징(邊京)에서 유럽의 학술탐험대에 의해서 한대(漢代)의 것이 발견됐으며 1951년 이후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 등지에서는 그 이전인 전국시대의 죽간도 잇달아 발견되고 있다.
또 죽간을 모방해서 만든 목간(木簡)도 사용됐는데 이것을 찰(札) 또는 첩(牒)이라고 불렀는데
중국의 북서쪽 볜징에서 발견된 것은 거의 목간이었으며 약(藥)의 처방전(處方箋) 등이 적혀 있는 죽간이 약간 포함돼 있었다.
오늘의 한자
擊 : 칠 격, 竹 : 대 죽, 事 : 일 사, 難 : 어려울 난, 事 : 일 사
편집국 편집장
2018-0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