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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수(黔首)
백성을 뜻하는 말인 검수(黔首)는 사기(史記)와 서경(書經)에서 볼 수 있다.
옛날 중국에서는 일반 서민은 보통 관(冠)을 쓰지 않고 검은 맨머리를 드러내고 다닌 데서 연유해 생긴 말이다.
검려(黔黎), 여민(黎民), 여서(黎庶), 여수(黎首), 여원(黎元)이라고도 하며 검(黔)과 여(黎)는 검은 색을 뜻한다.
사기(史記)의 시황본기(始皇本紀)에는 ‘새로이 백성을 검수라고 일컫는다’라는 대목이 있고 서경(書經) 요전(堯典)의 주(註)에는 ‘여(黎)는 검은 빛인데 백성의 머리가 모두 검은 빛이므로 여민이라 한다’라는 대목이 있다.
백성(百姓)은 자전적(字典的) 의미로는 서민(庶民)이라는 뜻과 서민에 대한 대칭으로서 백관(百官)의 부형자제(父兄子弟)라는 뜻을 모두 지니나 보통의 경우에는 주로 후자의 의미로 쓰인다.
하지만 시대에 따라 그 강조하는 의미가 조금씩 달라 신라에서는 백성이 일반적으로 피지배 공민(公民)을 의미해 골품제에 의해 생활수준이 규제됐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백성을 특정 신분층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그 구체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촌락의 지배자인 촌장(村長), 촌정(村正)이라는 견해와 백성성(百姓姓)이라는 특정 성씨(姓氏)를 가진 사회집단이라는 견해, 또 인리(人吏)와 같은 신분이라는 견해 등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이전 시기에 비해 고려 전기에는 백성의 의미는 보다 확대돼 지방 사회의 지배층을 포함한 용어로 사용됐다.
인리백성(人吏百姓), 향리백성(鄕吏百姓), 기인백성(其人百姓), 장리백성(長吏百姓), 서인백성(庶人百姓) 등이 바로 그러한 용례며 이는 지역공동체의 지배세력이 통일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 변동기를 수습하면서 지역사회 내의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지역 내의 민(民)과 자신을 백성으로 동일시한 데서 사용된 것이다.
물론 같은 백성이라 하더라도 이들은 향리 등과 서인으로 직역이 구분됐지만 고려 전기에는 출신 군현을 중심으로 동일한 군백성(郡百姓)이라는 결속의식이 강했던 것이다.
고려 후기에는 지배층의 토지탈점(土地奪占) 등으로 농장(農庄)이 확산되면서 농민이 유랑하는 현상이 많이 일어남에 따라 지방사회 내의 결속의식이 약화되면서 백성은 피지배층 일반을 가리키는 것이 일반화됐다.
지배층은 신분적으로 양인(良人)인 농민을 천인(賤人)으로 삼아 토지를 경작하게 했으며 조선 전기의 기록에 보이는 고려판정백성(高麗判定百姓)은 고려 말 양인확보정책의 일환으로 이들을 백성으로 판정한 계층이며 따라서 신분적으로는 양인으로 인정받았지만 천인에 가깝게 인식되는 계층이었다.
조선 전기에 백성은 양반이나 인리, 역리, 사전, 관노 등과 구별되면서 입사(入仕)해 양반계열에 편입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지만 신분상 양인이었으며 국가에 대해 공역(貢役)을 부담하는 계층이었다.
즉 양천제(良賤制)라는 신분구조 하에서 백성은 양인에 속했지만 지배계급으로서의 양반(兩班)과 구별되는 피지배계층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로 정착된 것이다.
조선 후기 이후 반상(班常)의 구별이 심화되면서 백성은 양반에 대칭되는 상민으로서 이러한 경향이 고착됐다.
오늘의 한자
黔 : 검을 검, 首 : 머리 수
편집국 편집장
2018-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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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족경중(擧足輕重)
다리 하나를 들어 어느 쪽에 두는 가에 따라 무게 중심이 이동(移動)돼 세력의 우열이 결정된다는 뜻의 거족경중(擧足輕重)은 후한서(後漢書) 두융전(竇融傳)에서 볼 수 있다.
한신(韓信)이 한창 한(漢)의 고조(高祖) 유방(劉邦)을 도와 항우(項羽)와 싸우고 있을 때의 일이다.
제(齊)의 변사(辯士) 괴통이 찾아와 유방을 배반하고 독립해 정족지세(鼎足之勢)를 이룰 것을 권하지만 한신은 유방과의 신의(信義)를 지켜 거절했다.
당시는 초(楚)와 한(漢)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던 상황이라 한신의 거취(去就)는 유방과 항우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돼 있었고 그래서 괴통은 한신에게 ‘천하가 처음 난을 일으켰을 때는 영웅호걸(英雄豪傑)들이 연이어 크게 한 소리로 외치자 천하의 뜻있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합치고 안개처럼 모여들었으나 이때는 다만 어떻게 하면 진(秦)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만이 공통의 관심사였으나 지금은 천하가 초(楚)와 한(漢)의 둘로 나뉘어 서로 다투고 있으며 현재 한왕(漢王) 유방과 항왕(項王) 항우의 두 목숨은 장군에게 달려 있는데 장군께서 한(漢) 나라를 위하면 한이 이기고 초(楚) 나라에 가담하면 초 나라가 이기게 돼 있다’며 권했다.
한신과 같이 저울대를 쥐고 있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 거족경중(擧足輕重)이다.
그러나 본디 이 말이 출현한 것은 그보다 약 230년 뒤인 동한(東漢) 초기이다.
후한서(後漢書) 두융전편(竇融傳篇)편에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국내를 평정할 때 최후까지 남은 군웅(群雄)은 하서(河西)의 두융(竇融)과 농서의 외효(潭浴) 그리고 촉(蜀)의 공손술(公孫述)이었다.
유수는 하서의 땅이 기름질 뿐 만 아니라 지리적으로도 농서와 촉에 연접(連接)돼 있어 먼저 두융을 회유(懷柔)해 둘을 치고자 했다.
그래서 두융에게 조서(詔書)를 보내 ‘지금 공손술과 외효가 다투고 있는 바 저울대는 바로 당신이 쥐고 있는데 이때 당신이 다리를 좌우 어느 쪽에 두는가에 따라(擧足左右) 저울의 무게는 달라질 것’(便有輕重)이라고 했는데 이 광무제 조서의 말 중에서 인용한 것이 거족경중(擧足輕重)이다.
결국 두융을 끌어들인 유수는 마침내 두 군웅을 멸하고 천하를 평정하게 되며 이때의 공으로 두융은 한 나라 조정에서 감찰을 맡는 정승인 대사공(大司空)에 올랐다.
이처럼 한 사람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이 어떤 사안(事案)에 대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때 이를 거족경중(擧足輕重)이라고 한다.
오늘의 한자
擧 : 들 거, 足 : 발 족, 輕 : 가벼울 경, 重 : 무거울 중
편집국 편집장
2018-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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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사정(蓋棺事定)
직역하면 관 뚜껑을 덮고 난 뒤에야 안다는 뜻으로 사람은 죽고 난 뒤에야 올바르고 정당한 평가를 할 수 있다는 말로 두보(杜甫)의 시(詩) 군부견간소혜(君不見簡蘇惠)에서 볼 수 있다.
이 시는 두보가 사천성(四川省) 동쪽 기주(夔州)의 깊은 산골로 들어가서 가난하게 살고 있을 때 역시 거기에 와서 살며 실의에 찬 나날을 보내고 있는 친구의 아들인 소혜란 사람에게 편지 대신 보낸 한 편의 시다.
군부견도변폐기지(君不見道邊廢棄池)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길가에 버려진 못을
군부견전자최절동 (君不見前者최折桐) 그대는 보지 못하였는가 앞서꺽여 넘어진 오동나무를
백년사수중금슬 (百年死樹中琴瑟) 백년 뒤 죽은 나무가 거문고로 쓰이게 되고
일곡구수장교룡(一斛舊水藏蛟龍)한 섬 오랜 물은 교룡을 품기도 한다
장부개관사시정(丈夫蓋棺事始定) 장부는 관을 덮어야 일이 비로소 결정된다
군금행미성노옹 (君今幸未成老翁) 그대는 아직 다행히 늙지 않았거늘
하한초췌재산중(何恨憔悴在山中) 어찌 원망하리오, 초췌히 산속에 있는 것을
심산궁곡부가처(深山窮谷不可處) 심산 궁곡은 살 곳이 못 되노니
벽력망량겸광풍(霹靂魍魎兼狂風) 벼락과 도깨비와 미친 바람까지 겸했노라
이는 사람을 겉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며 그 사람의 업적과 평가는 죽고 나서야 비로소 분명해 진다는 뜻으로 불의나 실패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
물론 죽은 후에 평가받는 것이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다.
현대 중국에서는 개관논정(蓋棺論定)이라고 하는 것이 보통이라 한다.
관 뚜껑을 덮어야 의론이 결정 된다는 뜻으로 비판적으로 쓰인다.
그리고 진서(晉書) 유의전(劉毅傳)에도 장부개관사정(丈夫蓋棺事定)이라는 말을 볼 수 있다.
오늘의 한자
蓋 : 덮을 개, 棺 : 널 관, 事 : 일 사, 定 : 정할 정
편집국 편집장
2018-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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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퍅자용(剛愎自用)
자만(自慢)해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固執)함을 뜻하는 강퍅자용(剛愎自用)은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선공(宣公) 12년에서 볼 수 있다.
진(晉) 나라와 초(楚) 나라가 패권을 다투고 있던 때 두 나라의 틈에 있던 정(鄭) 나라는 약소국이었으므로 항상 두 나라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었다.
기원전 597년 여름 초(楚) 나라 장왕(莊王)은 구실을 만들어 친히 군대를 이끌고 진(晉) 나라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정 나라를 향해 진격했고 정 나라는 결사 항전했으나 역부족이었고 정 나라의 구원 요청을 받은 진 나라 군대는 순임보(荀林父)를 중군 대장으로 선곡을 부장군으로 사회(士會)를 상군 대장으로 진군해 황하 부근에 이르러서 정 나라가 이미 초 나라에게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순임보는 장수들을 소집해 대책을 논의했는데 대부분 순임보의 생각처럼 상황이 종료돼 초 나라 군대가 철수한 이상 진 나라 군대도 철수하자는 의견이었으며 상군 대장 사회(士會)는 철군에 동의하며 전세(戰勢)를 ‘군사를 씀에는 틈을 보아 출동시키라고 했으며 초 나라의 우익군은 대장이 탄 전차를 끄는 말의 방향에 따라 진격하고, 좌익군은 풀을 모아 숙위(宿衛)할 준비를 하며, 띠(茅)로 깃발을 삼은 전군(前軍)은 적의 복병을 없애기 위해 진군하고, 중군은 싸움의 계략을 꾸미며, 후군은 정예부대로 후미를 단단히 지키고 있는데 사정이 좋음을 보고 진격하고, 어렵다는 것을 알고는 물러난다는 것은 용병의 바른 원칙이며(見可而進 知難而退 軍之善政也) 약한 자를 쳐서 빼앗고, 어지러운 자를 공격한다는 것은 전쟁 상의 좋은 원칙이니 장군께서는 잠시 우리 군사를 정비해 무력의 충실을 꾀하시는 것이 어떻겠냐’고 말했다.
그런데 부장군 선곡은 이런 말은 아예 듣지도 않고 강경하게 반대하고 나서며 ‘나는 죽어도 패업을 포기할 수 없으며 지금 그대들은 적들이 강하다는 말을 듣고 철수하겠다고 하는데 이는 대장부다운 행위가 아니’라며 그는 지휘에도 따르지 않고 직접 자기가 이끌던 군대를 데리고 강을 건너 초 나라 군대를 추격했다.
일이 이쯤 되자 순임보도 어쩔 수가 없어 전군(全軍)에 그의 뒤를 따라 전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침 철수하고 있던 초 나라 군대는 진 나라 군대의 추격 소식을 듣고 초 나라 군대는 대부(大夫) 오삼(伍參)은 돌아서서 진 나라 군대를 공격하자고 했고 영윤(令尹) 손숙오(孫叔敖)는 싸우지 말고 계속 철군하자고 했다.
그러자 오삼이 초 나라 장왕에게 자신의 분석과 의견을 말하길 ‘진 나라 군대의 순임보는 새로 임명된 장군이라 그의 위엄과 신망이 그다지 높지 않으며 부장군 선곡은 고집이 세고 모질어서 명령을 따르려 하지 않으니 돌아가서 공격한다면 크게 이길 것’이라 말했다.
오삼의 분석에 따라 초 나라 왕은 손숙오에게 군대를 돌려 진 나라 군대와 싸우게 한 결과는 초 나라가 대승(大勝)을 거뒀다.
진 나라 경공(景公)은 패전하고 돌아온 중군 대장 순임보(荀林父)의 관직을 박탈하고 스스로 책임을 지고 죽겠다는 그를 사형에 처할 준비를 하자 대부 사정자(士貞子)가 간언을 하고 나서며 ‘문공(文公) 때 우리나라가 초 나라와 성복에서 싸워 크게 이긴 적이 있는데 문공께서는 근심하는 얼굴을 보이시자 좌우의 신하들이 이렇게 큰 승리를 거두시고 무슨 걱정이라도 있느냐고 그 까닭을 묻자 문공께서는 초 나라에 득신(得臣)이라는 재상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으로 짐승도 곤경에 빠지면 죽을힘을 다해 싸우는 것인데 하물며 한 나라의 재상임에 다시 말 할 것이 있겠소(困獸猶鬪 況國相乎)라고 말씀하셨고 후에 문공께서는 득신이 군사를 철수시키는 도중에 초 나라 성왕의 명을 받고 자살했다는 소리를 듣고 웃으시며 후환이 없어졌구나라고 말씀하셨다고 하는데 초 나라 성왕이 득신을 죽인 것은 초 나라에게는 패배이고 진 나라에게는 승리와 같으며 왕께서 순임보를 죽이시는 것은 곧 초 나라의 승리이고 우리에게는 패배이며 순임보는 이미 여러 차례 공을 세운 바 있으며 지금은 자신의 잘못된 점을 바로 잡고 고치기에 마음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진 경공은 사정자의 권고를 듣고 다시 순임보의 관직을 복귀시켰다.
오늘의 한자
剛 : 굳셀 강, 愎 : 괴퍅할 퍅, 自 : 스스로 자, 用 : 쓸 용
편집국 편집장
2018-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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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36계 주위상(走为上) 때로는 작전상후퇴도 필요하다.
손자병법 제36계 주위상(走为上) 때로는 작전상후퇴도 필요하다.
때로 후퇴도 필요하다는 제36계 중 마지막 계책으로 계획적으로 후퇴하여 후퇴를 진격으로 삼고 기회를 노려 적을 섬멸한다는 뜻이다.
이 계책은 모략 가운데 상책으로 꼽히며 손빈은 후퇴로 전쟁에 임하면서 방연을 마릉도로 유인하여 일거에 섬멸하고 중국 고대 전쟁사의 화려한 한 폐이지를 장식한다.
손빈은 이 페이지를 남기고 떠나면서 손자병법과 그가 쓴 손빈 병법을 남긴다.
2000년 후 손자병법이 세상을 풍미할 때 세간에 떠도는 소문은 손자병법을 쓴 사람은 손빈이라는 주장이 있었으나 1972년 산둥성 임기현 은작산 서한묘에서 죽간이 출토 됐는데 그 중 손자병법과 손빈병법이 발견됨으로 이 주장은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남북조시대 남조 제(齊)나라의 명제(明帝) 소란(蕭鸞)은 황제에 즉위한 이후 반란과 보복이 두려워 무제의 아들 17명, 형제 12명 그리고 여러 명의 손자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러자 개국공신인 회계(會稽)태수 왕경칙(王敬則)이 생명의 위협을 느껴 반란을 일으켰는데 왕경칙은 군사 1만을 이끌고 수도 건강(健康)을 향해 진격했다.
당시 명제는 병이 위독한 상태였는데 왕경칙이 창졸지간에 동쪽에서 들고일어나자 조정이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명제의 둘째 아들 소보권(蕭寶卷)은 동궁에서 반란 진압을 논의하면서 사람을 시켜 지붕에 올라 살펴보게 했는데 정로정(征虜亭)에 불이 붙은 것을 보고 왕경칙이 이르렀다고 보고하자 소보권은 급히 행장을 꾸려 도망갈 준비를 했다.
누군가가 왕경칙에게 이를 보고하자 왕경칙이 “그들 부자에게 뾰족한 수가 있을 수 없겠지 단공(檀公)의 서른여섯 가지 계책 가운데 도망이 최고의 계책이라 했거늘 너희 부자는 서둘러 도망하는 게 좋겠지”라고 말했다.
왕경칙이 처음 공격해 올 때는 그 세가 아주 대단했으나 며칠 만에 패하고 말았는데 이때 왕경칙은 70여 세였다.
이 이야기는 남사(南史) 왕경칙전(王敬則傳)에 나오는데 여기에서 주위상이라는 말이 유래했으며 주위상계(走爲上計) 혹은 주위상책(走爲上策)이라고도 한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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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35계 연환계(连环计) 여러 가지 계책을 연격시키다.
손자병법 제35계 연환계(连环计) 여러 가지 계책을 연격시키다.
연환계는 제35계로 여러 계책을 연결하여 병용한다는 뜻이다.
손빈은 조정의 내란을 제거하기 위해 먼저 추상국과 공손열을 이간질 시킨 다음 추상국을 이용하여 공손열을 속이고 다시 공손열의 일로 추상국을 그만 두도록 한다.
춘추(春秋) 말기 제(齊)나라 대부 전상(田常)이 난을 일으키려고 했으나 국내 거족(巨族)인 고(高)씨, 국(國)씨, 포(鮑)씨, 안(晏)씨의 세력이 두려워 계획을 바꾸어 제나라의 왕 간공(簡公)에게 그들의 병력을 출동시켜 노(魯)나라를 정벌토록 부추겼다.
간공은 전상의 계획에 따라 거족들의 군사를 합쳐 노나라로 출병시키자 노나라 출신인 공자(孔子)는 고국인 노나라가 난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제자인 자공(子貢)을 제나라에 보내 노나라를 침범하지 말도록 설득하게 했다.
자공은 먼저 전상을 만나 약한 노나라를 이겨 제나라의 영토를 넓혀봐야 임금의 마음만 교만해지고 정적인 대신들과 장군들에게 공이 돌아가게 되므로 그들의 세력이 커지지만 강한 오(吳)나라를 공격하면 패하더라도 패배의 책임이 대신과 장군들에게 돌아가므로 결국 강국의 손을 빌려 재상과 뜻이 다른 정적을 제거할 수 있으며 임금을 고립시켜 재상이 나라를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된다는 논리를 펴 설득을 시작했다.
자공의 논리에 넘어간 전상은 자신이 위엄을 세우고 자리를 확고히 하기 위해 오나라를 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지만 제나라의 군사들이 이미 노나라를 향해 출병한 상황이었으므로 군사들을 돌려 오나라로 향하게 할 명분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자공은 자신이 오나라 왕을 설득해 오나라가 노나라를 도와 제나라를 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자공은 오나라 왕 부차(夫差)를 찾아가 지금 제나라가 노나라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힘을 키워 오나라와 세력을 겨루려 하고 있으니 차라리 오나라가 선수를 쳐 노나라와 연합해 제나라를 이긴 후 진(晉)나라까지 굴복시키게 되면 쉽게 패업을 달성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며 부차를 부추겼다.
오왕 부차는 먼저 월(越)나라를 친 후에 자공의 계책에 따르겠다고 했는데 패자가 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월나라가 여전히 배후에 존재하고 있으므로 부차의 입장에서는 쉽게 군사를 움직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시 부차는 월왕 구천과 싸워 이겨 구천에게 회계의 치욕을 안겼으며 구천은 부차에게 잡혀가 노예 생활을 하다가 충성을 맹세하고 석방돼 본국에 돌아와 복수의 칼을 갈고 있는 중이었다.
자공은 자신이 월나라에 가 월왕 구천이 군사를 파견해 오나라의 군사작전을 돕도록 하겠다고 했으며 그러면 월나라가 텅 비게 돼 월왕 구천도 어쩔 방법이 없게 되며 자연히 오왕 부차가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으로 오왕 부차는 크게 기뻐했다.
자공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월왕 구천은 길을 깨끗이 쓸고 교외까지 마중을 나와 몸소 자공의 수레를 몰아 숙사까지 모셨고 오왕 부차가 노나라를 도와 제나라를 치기에 앞서 후환이 되는 월나라를 먼저 치려고 한다는 말을 들은 월왕 구천은 머리를 조아리며 그가 취해야 할 방법을 물었다.
자공은 구천에게 오왕 부차가 바라는 대로 군대를 파견하고 귀중한 보물을 바쳐 정중히 예를 갖추면 오왕은 안심하고 출병을 해 제나라를 칠 것이고 싸움에서 이기면 다시 진(晉)나라를 칠 것으로 오나라는 계속되는 강적과의 싸움에 지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월나라가 오나라를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는 계책을 일러 주었고 구천은 자공의 계책을 따르기로 했다.
자공은 다시 오나라로 돌아와 오왕이 안심하고 군사를 움직일 수 있도록 월왕 구천에 대해 좋게 말해 주었으며 며칠 후에 월나라에서 사신을 보내와 월왕 구천이 군사를 파견하는 것은 물론 자신도 오왕을 따라 종군을 하겠다는 의사를 전해 왔다.
오왕은 자공의 의견을 좇아 월나라의 예물과 군사만을 거두고 월왕의 종군은 사양하고 오왕은 마침내 제나라 정벌에 나섰다.
자공은 만일 오나라가 이기게 되면 틀림없이 다시 노나라를 위협할 것을 예측하고 진나라의 힘을 빌려 오나라의 예기를 꺾을 계획을 세우고 진나라 정공(定公)을 찾아갔다.
자공은 오나라와 제나라의 싸움에서 만약 오나라가 지면 월나라가 싸움에 패한 오나라를 바로 공격할 것이므로 문제가 생기지 않지만 오나라가 이길 경우에는 오나라가 그 여세를 몰아 진나라를 공격할 것이라며 진나라가 서둘러 전쟁 준비를 하도록 설득했다.
진나라 왕은 자공의 말을 좇아 준비를 단단히 했으며 BC 484년 오왕 부차의 군대는 애릉(艾陵)에서 제나라 군대와 맞부딪쳐 크게 무찔렀다.
승세를 탄 오왕은 과연 자공의 예상대로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했지만 오나라는 만반의 준비를 해 둔 진나라에 오히려 대패하고 말았다.
수년 후인 BC 473년 와신상담을 통해 국력을 키운 월왕 구천은 문란해진 오나라를 공격해 오왕 부차를 죽이고 설욕을 했으며 춘추시대의 마지막 패자가 됐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중니제자열전(仲尼弟子列傳)에 나오며 당시에 자공이 여러 나라를 다니면서 서로 엮어 댄 것이 바로 연환계인데 자공은 이로써 노나라를 구하고 제나라를 뒤흔들었으며 오나라를 패하게 하고 진나라를 강하게 만들고 월나라를 패자로 만들었다.
자공이 각지를 다니면서 유세한 10년 동안 5개 나라의 정세가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듯이 연환계는 여러 개체를 서로 복잡하게 연결해 상호 견제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안위를 지키는 전략으로 이때 개인의 이익이나 명예나 지위 등을 이용하는 것이 중요한데 이는 사람은 보편적으로 자기가 속한 단체나 사회, 국가의 이익보다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익을 더 중시하기 때문이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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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34계 고육계(苦肉计) 나를 희생해서 적을 안심시키다.
손자병법 제34계 고육계(苦肉计) 나를 희생해서 적을 안심시키다.
고육계는 제34계로 상식에서 벗어난 자기희생으로 적을 속여 목적을 이룬다는 뜻이다.
방연은 이 계략으로 한의 군신을 속이고 한에 볼모로 가 있던 위의 태자 신을 귀국시키는데 성공한다.
춘추(春秋) 말기 오(吳)나라 왕 요(僚)를 암살하고 왕위에 오른 합려(闔閭)는 위(衛)나라에 피해 있는 전왕 요의 아들 공자 경기(慶忌)를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오자서(伍子胥)는 요리(要離)를 추천했는데 요리는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오왕과 다투기 시작했다.
오왕은 화가 나서 요리의 팔을 잘라 버렸고 요리는 위나라로 도망해 경기에게 몸을 의탁했으며 합려는 요리의 가족을 참수했다.
경기는 첩자를 오나라에 보내 염탐을 하도록 했는데 합려가 이미 요리 일가를 참수했다는 소문을 들은 경기는 요리를 신임하게 됐다.
그때부터 요리는 경기의 심복이 돼 그림자처럼 따라다녔고 두 사람이 한 배를 탈 기회가 오자 요리는 경기를 죽이고 자신도 죽었으며 오나라 왕은 경기라는 화근을 제거하고 남방의 패주가 됐다.
고육계는 대부분이 첩자를 이용하는 반간계(反間計)나 거짓 투항하는 사항계(詐降計)와 더불어 사용된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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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33계 반간계(反间计) 적의첩자를 역 이용 한다.
손자병법 제33계 반간계(反间计) 적의첩자를 역 이용 한다.
반간계는 제33계로 상대방의 첩자를 역이용하여 교묘히 써 먹는다는 뜻이다.
손빈은 장기적으로 성고를 지킬 수 없는 상황에서 반간계를 통해 방연에게 그릇된 정보를 주고 이에 방연은 장기 포위전을 포기하고 성을 공격한다.
간첩을 운용하는 데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바로 향간(鄕間), 내간(內間), 반간(反間), 사간(死間), 생간(生間)으로 이 다섯을 동시에 쓰면 적은 우리의 간첩 운용술을 파악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를 이르러 신묘한 방법이자 군주의 법보라고 하는 것이다.
향간이란 적국의 동향 사람을 이용해 간첩을 시키는 것이며 내간이란 적국의 관리를 이용해 간첩을 시키는 것이고 반간은 적국의 간첩을 이용해 간첩을 시키는 것이고 사간이란 거짓 정보를 만들어 우리 측 간첩을 통해 적국의 간첩에게 전하게 하는 것이며(거짓임이 밝혀지면 살아날 수 없으므로 사간이라고 함) 생간이란 살아서 돌아온 우리 측 간첩을 말하며 손자병법(孫子兵法) 용간(用間)에서 볼 수 있다.
반간계는 중국의 대표적 병법인 36계 가운데 33번째 계책으로 그 대표적인 예로는 삼국연의(三國演義)의 적벽 대전에서 주유(周瑜)가 펼친 반간계를 들 수 있다.
후한 말 북중국을 장악한 조조(曹操)가 남쪽으로 눈을 돌려 형주(荊州)를 공격하자 조조의 백만 대군이 형주를 향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형주의 유종(劉琮)은 비밀리에 사자를 보내 조조에게 항복해 버렸다.
순조롭게 형주를 접수한 조조는 내친김에 말머리를 돌려 유비(劉備)와 손권(孫權)을 공격했는데 유비와 손권은 연합해 조조에게 맞섰는데 이것이 바로 적벽 대전이다.
연합군의 총사령관인 주유는 화공(火攻)으로 조조군을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황개(黃蓋)와 더불어 고육지책을 구사하는 한편 조조군의 유능한 수군 장수인 채모(蔡瑁)와 장윤(張允)을 제거하기 위해 반간계를 펼쳤다.
마침 주유의 동향인이자 조조의 막하인 장간(蔣干)이 주유군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주유군의 진중에 오자 장간의 계획을 간파한 주유는 역으로 장간을 이용할 계획을 세우고 채모와 장윤의 거짓 항복 문서를 만들어 놓았다.
장간은 주유가 잠든 틈을 타 이 문서를 발견하고 즉시 문서를 품에 품고 부랴부랴 돌아가서 조조에게 바쳤고 조조는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채모와 장윤을 죽여 버렸으며 주유는 반간계에 성공을 거둔 뒤 적벽 전투에서 조조군을 격파하고 대승을 거뒀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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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32계 공성계(空城计) 비어있는 성으로 유인하다.
손자병법 제32계 공성계(空城计) 비어있는 성으로 유인하다.
빈 성으로 유인하는 공성계는 제32계로 성을 방어할 능력이 없을 때 적으로 하여금 매복을 의심하여 전진하지 못하게 한다는 뜻이다.
손빈은 이 계략으로 위의 선발부대를 철군 시키고 성고의 위기를 모면하자 뒤이어 방연의 대군이 성고를 포위 한다.
곽충이 말하는 세 번째 일인 곽충삼사(郭沖三事)에는 제갈량(諸葛亮)이 양평(陽平)에 군대를 주둔시키고 위연(魏延)에게 정예병을 이끌고 동쪽을 향해 진공하게 하고 제갈량 자신은 만 명만 남겨 성을 지키고 있었다.
진선제(晉宣帝 사마의(司馬懿))가 20만의 군사를 이끌고 제갈량에 대항했는데 진군하는 도중 위연과 길이 엇갈려 비켜 가게 됐으며 제갈량이 있는 양평에서 60리 떨어진 곳에서 정찰병이 사마의에게 제갈량의 성안에 있는 병력이 적고 약하다고 보고했다.
제갈량 역시 사마의가 눈앞에 와 있으니 위연의 부대로 가자니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며 되돌아 사마의의 군대를 쫓자니 세력이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으며 장병들은 모두 대경실색하고 어찌해야 할 바를 몰랐다.
그러나 제갈량은 태연자약하게 군중에 명령을 내리기를 깃발을 내리고 북을 울리지 말고 함부로 장막을 벗어나지 말며 성문 네 개를 모두 열어 바닥을 쓸고 물을 뿌리라고 했다.
사마의는 제갈량이 신중하다고 평소에 말하곤 했는데 기세가 약한 것을 보고 복병이 있으리라 의심해 군사를 이끌고 북쪽 산길로 철수했다.
다음 날 식사 때에 제갈량은 부하들에게 박장대소를 하며 “사마의는 분명 내가 겁이 많다고 말하면서 복병이 있는 줄 알고 산으로 달아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 제갈량전(諸葛亮傳)의 촉기(蜀記) 조량오사은몰불문어세자(條亮五事隱沒不聞於世者, 곽충오사(郭沖五事)를 인용한 배송지(裵松之) 주(注)에 나온다.
제갈량은 제1차 북벌에 앞서 후주 유선에게 출사표를 올리고 출병을 해 면양(沔陽)에 주둔하는데 이 기록에 대한 주에 위의 내용이 나오고 이 이야기에서 공성계가 유래했는데 배송지는 이 곽충삼사를 인용한 후 난왈(難曰)을 달아 이에 대한 회의를 표시했다.
양평은 한중(漢中) 땅에 있는데 제갈량이 처음 양평에 주둔할 때 선제(사마의)는 형주도독으로 완성(宛城)에 주둔했고 조진이 죽은 후에 비로소 관중(關中)에서 제갈량과 대치했다.
위나라가 선제를 완성에서 서성(西城)으로 파견해 촉나라를 정벌하게 했을 때 마침 장마철을 만나 일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때를 전후해서는 더 이상 양평에서 교전한 일이 없었다.
곽충의 말대로 선제가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고 제갈량의 병력이 적고 약했다면 설령 복병이 있다는 의심이 들었다 하더라도 방비책을 마련해 신중하게 했어야지 도망갈 필요가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이 책에서 인용한 것은 모두 거짓이다.
곽충삼사는 곽충의 조량오사은몰불문어세자, 즉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제갈량의 일화 다섯 가지 중에서 세 번째에 해당한다.
참고로 곽충오사를 요약하면
제1사. 제갈량이(익주에서) 형법을 준엄하게 시행해 모든 사람들이 불평을 하자 법정(法正)이 이를 간했고 제갈량은 형법을 엄정하게 시행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이에 대해 배송지는 “제갈량이 실권을 잡고 익주를 다스리기 시작한 것은 유비가 이릉(夷陵)의 전투에서 오나라에 대패하고 백제성에 머물다가 죽은 후부터였고 법정은 유비보다 먼저 죽었으므로 법정이 제갈량의 준엄한 형정에 대해 간했다는 사실은 그 신빙성이 높지 않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제2사. 조조가 유비에게 자객을 보냈는데 자객이 유비와 대면해 위나라를 정벌할 계책을 제시하며 유비와 가까워지려 했는데 그의 행동거지를 본 제갈량이 그가 조조가 보낸 자객임을 간파하자 담을 넘어 도망하고 말았다.
이에 대해 배송지는 “유비는 사람을 보는 눈을 가진 사람인데 이 자객에게 혹했다면 이 사람은 분명 제갈량에 버금가는 일세의 기인일 것인데 그런 기인이 왜 자객으로 파견됐을까? 더구나 이 사람이 죽지 않았으니 위나라에서 대단한 지위에 올랐을 텐데 그에 대한 아무런 후일담도 없다”고 의문을 제기했다.
제3사. 공성계. 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설명했다.
제4사. 제갈량이 기산(祁山)에 진출해 농서(隴西), 남안(南安)을 항복시키고 천수(天水)를 포위하고 기성(冀城)을 함락시키고 강유(姜維)를 포로로 잡고 약탈당한 남녀 수천 명을 촉 땅으로 되돌려 보내자 사람들이 모두 제갈량에게 축하의 인사를 했다.
그러자 제갈량은 한 사람이라도 죽는 것은 모두 자신의 죄인데 이런 일로 축하를 받으니 부끄럽다고 말하자 촉나라 모든 사람들은 이로써 제갈량이 영토를 넓힐 뜻이나 가지고 있는 게 아니라 위나라를 삼킬 뜻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란 것을 알게 됐다.
이에 대해 배송지는 “제갈량이 위나라를 삼키려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주 오래된 사실로 사람들이 이때 비로소 알게 된 것이 아니며 또한 군대를 동원했지만 이룬 것 없이 많은 사람들이 사상을 당했으며 세 군이 항복했지만 얻은 것도 없고 강유는 천수 땅의 필부일 뿐으로 얻었다고 해도 위나라에 아무런 손실이 되지 않았으며 서현(西縣)의 천호를 빼앗았다고 해도 가정(街亭)에서의 손실이 벌충되지 못하는데 무슨 공이 있다고 촉나라 사람들이 축하를 했겠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제5사. 위명제(魏明帝)가 선왕(宣王 사마의)을 보내 장합(張郃)의 군대와 옹(雍)과 양(凉) 지역의 군사 30여만을 통솔해 비밀리에 검각(劍閣)으로 진격하게 했는데 당시에 제갈량은 기산에 있었는데 병사들을 본국에서 출발한 군사들과 교대해 주기로 했는데 위의 대군이 진격해 오자 참모들이 병사들을 1개월만 더 머무르게 하자고 건의했고 제갈량은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병사들을 돌아가도록 하자 병사들이 모두 감격해 남아서 일전을 치르기를 원했고 이 싸움에서 촉군은 대승을 거두고 위의 장군 장합을 죽였다.
이에 대해 배송지는 “제갈량의 대군이 관중 농서에 있었는데 위나라 사람들이 어떻게 제갈량의 군대를 넘어 검각으로 갈 수 있었겠으며 제갈량은 원래 전쟁터에서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는데 어째서 군사를 교대해 촉으로 돌려보냈겠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곽충오사는 삼국지의 본문에는 인용되지 않았으며 삼국지의 배송지 주와 삼국연의에서는 인용됐는데 그 사실의 신빙성은 그다지 크지 않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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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계 미인계(美人計) 미녀를 이용하여 적을 대한다.
패전계(敗戰計) 상황이 가장 불리한 경우 열세를 우세로 바꾸어 패배를 승리로 이끄는 전략이다.
제31계 미인계(美人計) 미녀를 이용하여 적을 대한다.
제32계 공성계(空城計) 빈 성으로 유인해 미궁에 빠뜨린다.
제33계 반간계(反間計) 적의 첩자를 역이용한다.
제34계 고육계(苦肉計) 자신을 희생해 적을 안심시킨다.
제35계 연환계(連環計) 여러 가지 계책을 연결시킨다.
제36계 주위상(走爲上) 때로는 전략상 후퇴도 필요하다.
손자병법 제31계 미인계(美人計) 미인을 이용해 적을 대하다.
미인계는 제31계로 이 계책은 고전 병법인 육도에서 유래하며 미녀를 이용해 목적을 달성한다는 뜻이다.
공손열은 미인계로 제왕의 근신이 되어 제왕으로 하여금 자기를 따르게 만들고 전기 장군과 손빈의 입지를 매우 좁게 만든다.
강대국과 대적해서 싸우게 될 땐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워지니 형세에 순응해서 일시적으로라도 적을 섬겨야 하는 경우가 있다.
섬기는 방식에도 상중하책이 있게 마련이며 영토를 떼어주고 화친을 구해 섬기는 것이 제일 하책 중의 하책이요, 재물을 주고 화친을 구해 섬기는 것이 그 중간이요, 아름다운 여자를 보내 섬기는 것이 상책이다.
아름다운 여자를 보내 섬기면 적장의 마음이 해이해지고 군대의 규율이 흩어지니 자연히 전력이 약하게 될 수밖에 없다.
월나라 왕 구천이 서시(西施)라는 미인을 오나라 왕 부차에게 보내 그가 서시에게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는 틈을 타 전에 맛보았던 패배를 승리로 이끈 데서 나온 말이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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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30계 반객위주(反客为主) 주인과 손님이 바뀌다.
손자병법 제30계 반객위주(反客为主) 주인과 손님이 바뀌다.
반객위주는 제30계로 주객이 전도된다는 것으로 손님이 주인이 되어 주도권을 잡는다는 것이다.
손빈은 미인계를 깨기 위해 종리춘을 궁으로 보내 은어로 제왕을 설득하고 제왕은 종리춘의 지혜를 높이 사 종리춘을 왕후로 봉한다.
손빈은 국가를 위해 사사로운 감정을 접고 종리춘이 왕궁의 주인이 되도록하고 그녀를 설득해 왕국의 주도권을 잡도록 한다.
당(唐)나라의 장군 복고회은(僕固懷恩)이 반란을 일으킨 후 토번(吐蕃)과 회흘(回紇)을 선동해 30만 연합군을 이끌고 중원을 침범했는데 연합군은 파죽지세로 경양(涇陽)까지 육박했다.
당시 경양의 수비대장은 곽자의(郭子儀)였는데 겨우 1만여명의 정병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런 시점에서 복고회은이 병사했으며 토번과 회흘은 중간 역할을 하는 인물이 없어지자 서로 지휘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암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양군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자 토번은 동문 밖에 주둔하고 회흘은 서문 밖에 주둔하면서 서로 연락도 취하지 않게 되자 곽자의는 이런 기회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는 안사(安史)의 난 때 회흘과 연합작전을 펴 안녹산에 대응한 적이 있었으므로 비밀리에 회흘의 군영에 사자를 보내 과거의 친구들끼리 옛정을 나누자고 제안했고 회흘의 도독 약갈라(藥葛羅)도 정을 중시하는 사람이었는데 곽자의가 경양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만나 보고 싶어 했지만 그는 곽자의가 혼자 오기 전에는 믿을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런 보고를 받은 곽자의는 혼자 가기로 결정 하자 장졸들은 모두 회흘이 속임수를 쓰고 있다고 말하며 곽자의 혼자 가는 것을 반대했지만 곽자의는 호위병을 거느리지 않고 혼자서 회흘의 진영으로 갔다.
약갈라는 곽자의를 위해 잔치를 벌였고 두 사람은 아주 친숙해져 환담을 나누며 어느 정도 술이 취하자 곽자의는 약갈라를 설득하기 시작했는데 “당나라와 회흘의 관계는 아주 좋으며 과거 안사의 난 때 회흘은 큰 공을 세웠고 당나라도 회흘에 섭섭하게 대하지 않았으며 지금 토번은 회흘을 이용해 당나라를 쳐 자신들의 이익을 취하려는 것”이라며 설득했다.
곽자의에게 설득당한 약갈라는 “당신의 말에 일리가 있어 우리가 토번에게 이용당할 수는 없으며 이제부터 당나라와 연합해 토번을 치도록 하겠다”며 쌍방은 그 자리에서 연합을 맹약했다.
이 소식을 들은 토번은 상황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급변한 것을 알고 철병을 시작했고 곽자의와 회흘의 연합군은 토번군을 추격했으며 토번군은 대패했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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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29계 수상개화(树上开花) 나무에 꽃을 피게 한다.
손자병법 제29계 수상개화(树上开花) 나무에 꽃을 피게 한다.
수상개화는 제29계로 허장성세를 통해 적이 진위를 구별하지 못하게 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다.
손빈은 강적을 만나 수상개화를 연속 이용해 성고의 위기를 벗어나고 한 태자를 구출한다.
전국시대 제(齊)나라 민왕(涽王)이 남으로 초(楚)나라를 쳐 승리하고 서로는 삼진(三晉)을 깨트리고 송(宋)나라를 멸망시켜 천여 리나 되는 땅을 넓히는 등 세력이 강해지자 제후들이 제나라에 복종하기 시작했다.
민왕은 교만해졌고 백성들은 그의 정치를 견디기 힘들어했다.
연(燕)나라 소왕(昭王)은 교만한 제나라를 치기 위해 명장 악의(樂毅) 등을 시켜 진(秦), 한(韓), 조(趙), 위(魏) 등 네 나라와 합종을 성사시켰으며 마침 제후들이 제나라 민왕이 교만하고 포악한 것을 미워하던 참이라 모두 앞을 다투어 합종에 참여했다.
악의는 5개국 연합군의 총대장이 돼 제나라를 공격해 크게 승리했고 제나라 민왕은 거(莒)로 도망해 버티다가 살해됐다.
싸움이 끝나자 제후국의 연합군은 각자 본국으로 돌아갔으나 악의는 연나라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에 남아 아직 항복하지 않은 제나라의 성과 고을들을 평정하고 정령을 펴기를 5년만에 제나라의 70여개 성을 항복받아 모두 연나라의 군현(郡縣)으로 편입시켰으며 남은 것은 거(莒)와 즉묵(卽墨)의 두 성뿐이었다.
제나라에 별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전단(田單)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연나라 군사가 침입했을 때 전단은 그의 집안사람들을 시켜 차축 끝을 모조리 잘라 버리고 쇠로 싸서 튼튼하고 달리기 쉽도록 만들었다.
이윽고 연나라 군대의 공격에 성이 함락되자 제나라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달아났지만 차축이 부러지고 수레가 부서지는 바람에 대부분 연나라 군사의 포로가 됐지만 전단의 집안사람들은 차축을 쇠로 싸 두었기 때문에 탈출에 성공해 무사히 즉묵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명장 악의가 이끄는 연나라 군사는 즉묵을 포위했고 즉묵의 대부(大夫)는 패해 전사하고 말았으며 성안의 사람들은 전단이 현명하고 병법에 능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를 장군으로 추대했으며 전단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성안 사람들을 이끌고 즉묵을 지키며 연나라 군사에 대항했다.
그러던 차에 연나라 소왕이 죽고 태자 때부터 악의를 못마땅하게 생각해 온 혜왕(惠王)이 즉위했으며 이를 안 전단은 악의를 제거하기 위한 심리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제나라 성 중에서 항복하지 않은 것은 둘뿐이며 악의는 처벌이 두려워 귀국하려 하지 않고 말로만 제나라 토벌을 하고 있지 실은 전쟁을 질질 끌며 자신이 제나라 왕이 되려고 하나 제나라 사람들이 심복하지 않기 때문에 잠시 즉묵에 대한 공격을 늦추어 시기를 엿보는 중이며 제나라 사람들은 다만 다른 장군이 와서 즉묵이 쑥밭이 될까 두려워할 뿐”이라고 소문을 만들어 냈다.
그렇지 않아도 악의를 의심하고 있던 연혜왕은 제나라 첩자들이 퍼뜨린 흑색선전을 믿고 기겁(騎劫)을 장군으로 임명해 보내고 악의를 불러들였고 악의는 왕의 미움을 사 교대된 것을 알자 벌을 받을까 겁이 나서 조나라로 망명했고 연나라 군사들은 모두 그가 갈린 데 대해 분개했다.
전단은 먼저 요동하는 민심을 안정시키고 승리에 대한 확신을 심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성안의 사람들에게 끼니때마다 뜰에다 음식을 차려 놓고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그러자 하늘을 날던 새들이 매끼 음식을 먹기 위해 모두 성안으로 날아 내려왔으며 성 밖의 연나라 군사들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하게 여겼으며 전단은 이를 가리켜 신령이 내려와 자기를 가르쳐 주는 것이라고 선전했다.
그리고 성안의 사람들에게도 신령이 내려와 자기의 스승이 될 거라고 선전한 후에 병사 한 사람을 골라 스승으로 모시고 명령을 내릴 때마다 스승인 신령의 지시라고 말했다.
성안의 백성이나 성 밖의 연나라 군사나 모두 신령이 전단을 돕고 있다고 믿게 됐으며 성안의 백성들은 안정과 확신을 얻었고 성 밖의 연나라 군사들은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전단은 백성들의 적개심을 증폭시키는 작전을 펼쳐 은밀히 “나는 연나라 군사가 포로로 잡힌 제나라 병졸들의 코를 베고 그들을 앞장세워 우리와 싸우면 즉묵이 패할 것 같아 두렵다”다는 소문을 연나라 군사들에게 퍼뜨렸다.
연나라 군사들은 이 소문을 듣자 그대로 실행했고 성안의 사람들은 항복한 제나라 군사들이 모두 코를 베이는 형벌을 당한 것을 보자 분개해 굳게 성을 지키며 혹시 포로가 되지나 않을까 두려워했다.
전단은 또 첩자를 풀어 “나는 연나라 사람들이 성 밖의 무덤을 파헤치고 조상을 욕되게 하지 않을까 겁이 나며 그런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섬뜩하다”는 소문을 연나라 군사들에게 퍼뜨렸다.
연나라 군사들은 또 무덤을 모조리 파헤치고 시체를 불살라 버리자 즉묵 사람들은 성 위에서 이를 보고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분노가 열 배나 더해 달려 나가 함께 싸우기를 원했으며 전단의 계책으로 성안의 사람들이 적개심이 탱천하고 군기가 바짝 들게 된 것이다.
전단은 병사들이 싸움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보자 비로소 대오를 정비해 전투 준비를 완료하고 무장한 병사들을 모두 숨겨 두고 늙은이와 아이들과 부녀자들을 성 위로 올려 보내놓고 사자를 보내 항복을 약속하자 연나라 군대는 모두 만세를 외쳤다.
전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또 하나의 작전을 폈는데 전단은 민간의 황금 2만냥을 거두어 즉묵의 부호들을 통해 연나라 장수 기겁에게 보내고 거짓 정보를 흘려 부호들은 즉묵이 곧 항복하려고 하는데 그러면 자기 가족과 처첩들만은 목숨을 살려 달라고 부탁하자 연나라 장수들과 병졸들은 몹시 기뻐하며 마치 승리가 눈앞에 있는 듯 점점 더 방심해 기강이 해이해지기 시작하자 전단은 비로소 본격적으로 작전을 펴기 시작했다.
전단은 천여 마리의 소를 모아 붉은 비단 천에 오색찬란한 용무늬를 그려 소에 입힌 다음 예리한 칼날을 쇠뿔에 매달고 갈대를 쇠꼬리에 매달아 기름을 들이부어 불에 잘 타게 만들었다.
그리고 성벽에 수십 개의 구멍을 뚫고, 밤을 틈타 쇠꼬리에 불을 붙여 그리로 소를 내보내 적진으로 돌진시키고 5000 군사가 그 뒤를 따르자 연나라 군사는 크게 당황했으며 밤중이라 쇠꼬리에 붙은 불이 더욱 빛이 났는데 연나라 군사들이 자세히 살펴보니 전부 용의 모습을 하였는데 그것에 부딪치기만 하면 모조리 죽거나 상하거나 하는 것이었으며 거기에 5000의 군사가 뒤를 이어 뛰어들었고 성안에서는 북을 치며 함성을 울렸으며 노인과 아이들도 모두 구리그릇을 두들기며 성원하는데 그 소리가 천지를 뒤엎는 것 같았다.
연나라 군사는 크게 놀라 패해 달아났으며 전단의 제나라 군사들은 연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적장 기겁을 죽였다.
전단의 군대는 도주하는 적을 뒤쫓아 연나라에 항복했던 성과 고을들이 다시 연나라를 배반하고 전단에게 귀복해 군사가 날마다 늘어났으며 연나라에 잃었던 70여 성은 다시 제나라의 것이 됐으며 전단은 이 공으로 안평군(安平君)에 봉해졌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전단열전(田單列傳)에 나오는데 전단이 쇠꼬리에 불을 붙여 적군을 공격한 데서 화우지계가 유래했다.
이 계책은 원래 꽃이 없는 나무에 인위적으로 꽃을 만들어 붙인다는 뜻을 가진 허위로 진영을 부풀려 배치함으로써 실제보다 세력이 강대하게 보이게 만드는 계책인 삼십육계의 제29계인 수상개화(樹上開花)의 예로 사용된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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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28계 상옥추제(上屋抽梯) 지붕에 올라 사다리를 없앤다.
손자병법 제28계 상옥추제(上屋抽梯) 지붕에 올라 사다리를 없앤다.
상옥추제는 제28계로 적을 고의로 지붕으로 유인하여 아군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끌어들인 후 적군의 사다리인 퇴로를 차단하여 승리를 거둠을 말한다.
또 다른 해석은 아군을 사지로 몰아서 물러날 곳을 없앤 다음 적과 생사를 걸고 결전을 벌이게 하는 것이다.
손빈은 이 계책을 응용해 초의 항복을 얻었으나 방연의 미움을 사게 된다.
BC204년, 한(漢)나라의 한신(韓信)과 장이(張耳)는 2만여 병사를 거느리고 조(趙)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 왕 헐(歇)과 진여(陳餘)는 20만 정예부대를 집결시켜 정형(井陘)에서 적을 맞이하는데 조나라 측은 한신이 멀리에서 달려와 군사들이 피로한 데다 자기 쪽 군사가 월등히 많으므로 승리를 장담하고 있었다.
한신은 먼저 가볍게 무장한 기병 2000을 뽑아 각각 붉은 기를 가지고 샛길로 나아가 조나라 진지를 바라보는 산속에 숨어 있도록 했다.
이들의 임무는 조나라 군대가 진지를 비워 두고 거짓으로 패주하는 한군을 뒤쫓으면 재빨리 조나라 진지로 뛰어들어 조나라 기를 뽑아 버리고 한나라의 붉은 기를 세우는 것이었다.
한신은 또한 병사 1만을 보내 강의 동쪽에 배수진(背水陣)을 치도록 했다.
적은 인원으로 많은 적을 상대하기 위한 극약 처방이었으며 조나라 군사들은 이것을 바라보고 크게 웃었다.
이튿날 새벽, 한신과 장이는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 진영으로 쳐들어가자 조나라 군대는 진문을 열어젖히고 한나라 군대를 맹렬히 공격했다.
한신의 군대는 잠시 격전을 벌인 다음 거짓으로 북과 기를 버리고 강까지 퇴각하여 배수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는 부대와 합류했다.
한신의 예상대로 조나라 군사는 본진을 비워 두고 한신의 군대를 뒤쫓았고 한나라의 군사들은 더 이상 물러날 수 없음을 알고 죽을힘을 다하여 싸웠다.
한편 산속에 숨어 때를 기다리던 2000명은 이 기회를 틈타 일제히 조나라의 진지로 달려 들어가 조나라의 기를 뽑아 버리고 한나라의 붉은 기 3000여개를 세웠다.
배수진을 친 한나라 군대의 맹렬한 저항으로 조나라 군대는 싸움에 이기지 못하고 할 수 없이 진지로 되돌아갔지만 진지의 성벽 위가 온통 붉은색의 한나라 깃발뿐인 것을 보고 한나라가 벌써 조나라의 장군들을 모두 사로잡은 것으로 생각해 정신을 잃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조나라 장수들이 도망하는 군사들의 목을 베며 독전을 했으나 달아나는 군사들을 막을 방법이 없었으며 한나라 군대는 조나라 군대를 양쪽에서 협공해 대파하고 군사들을 포로로 잡았으며 진여의 목을 베고 조왕 헐을 사로잡았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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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27계 가치부전(假痴不癫) 거짓으로 미친척하다.
손자병법 제27계 가치부전(假痴不癫) 거짓으로 미친척하다.
가치부전은 제27계로 본 뜻은 미친 척하며 모든 것을 숨기는 것으로 마치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이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손빈은 이 계책을 이용해 방연을 속이는데 성공한다.
239년, 위(魏)나라 명제(明帝) 조예(曹叡)는 병이 위급해지자 사마의(司馬懿)와 조상(曹爽)에게 여덟 살밖에 안 된 아들 조방(曹芳, 폐제(廢帝))을 부탁했다.
조상은 나이가 어리고 경험이 부족해 처음에는 사마의를 어른으로 대접했으나 얼마 후 그의 주변에 정밀(丁謐), 하안(何晏), 이승(李勝), 필궤(畢軌) 등과 같은 명사들이 모여들고 그의 동생들이 조정의 핵심 위치에 서게 되자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조방에게 사마의를 태부(太傅)에 임명하도록 건의하고 태부는 세자의 스승이니 표면적으로는 사마의를 존대한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의 병권을 박탈한 것으로 그 후 조상은 사마의를 더욱 배척하려고 들었다.
사마의는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그의 두 아들 사마사(司馬師)와 사마소(司馬昭)도 관직을 사퇴하고 물러나도록 했다.
이들 부자는 집에서 쉬면서 정변을 일으킬 구상을 하기 시작해 그는 아들 사마사에게 명해 비밀리에 망명자 3000명을 낙양성(洛陽城) 근처에 모아 놓고 필요할 때 즉시 소집될 수 있도록 했다.
248년 겨울, 조상은 이승을 형주자사(荊州刺史)로 파견하면서 사마의의 집에 가서 작별 인사를 하는 것처럼 하고 동정을 살펴보라고 지시했다.
사마의는 이승이 왔다는 말을 듣자 즉시 머리를 풀어 헤치고 이불을 덮은 채 누워 목이 마르다는 시늉을 하면서 일부러 옷깃에 죽을 흘리며 이승에게 “자네가 병주(幷州)로 발령이 났다며? 병주는 오랑캐 땅과 가까우니 잘 수비하게. 나는 목숨이 다한 것 같아 아마 다시 보기 어려울 걸세. 조상장군에게 앞으로 내 아들 좀 잘 돌봐 달라고 전해 주게”라며 헛소리를 해 댔다.
이승은 “병주가 아니라 형주”라고 하자 사마의는 “글쎄, 병주에 가거든···” 이승이 다시 “형주라니까요”하자 사마의는 “늙으니까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아서 자네가 뭐라고 하는지 잘 못 알아듣겠네”라고 말했다.
이승은 돌아가 사마의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조상에게 보고했고 조상은 사마의를 더 이상 경계하지 않았다.
249년 정월, 조상은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조방을 수행해 낙양성 남쪽 교외에 있는 명제(조예)의 무덤인 고평릉(高平陵)을 참배했는데 사마의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정변을 일으켜 조상과 그 일당들을 반역죄로 몰아 모조리 죽이고 다시 조정의 대권을 장악해 승상의 자리에 올랐다.
이처럼 바보 같은 척하는 술수로 상대방을 속이는 것을 가치부전(假痴不癫)이라 한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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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26계 지상매괴(指桑骂槐) 뽕나무를 가리키며 회나무를 욕하다.
손자병법 제26계 지상매괴(指桑骂槐) 뽕나무를 가리키며 회나무를 욕하다.
지상매괴는 제26계로 상대에게 위협을 주어 복종하게 만든다는 뜻으로 훗날 군대의 장수들도 이 방법으로 위엄을 세우고 군기를 다스렸으며 강대국은 약소국에 위협을 주어 말을 듣게 했다.
종리춘이 이 계책을 이용해 미옥을 죽여 후궁들에게 본보기를 보이고 빈비들이 자신의 말을 잘 듣도록 만든다.
춘추시대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관중(管仲)을 재상으로 삼은 후 제나라는 크게 발전하게 됐는데 환공은 중원의 패자가 되기 위해 8국 연맹회의를 열고 자신이 맹주가 될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위(位), 노(魯), 위(衛), 조(曹)나라가 참석하지 않아 환공은 크게 노해 각국을 연합해 먼저 노나라를 치려고 하자 송(宋)나라가 반대하고 돌아가 버렸다.
환공은 격노해 이번에는 송나라를 치려고 했는데 이때 관중의 계책은 “송나라는 멀고 노나라는 가깝우며 게다가 노나라는 회의에 참석하지도 않았으니 노나라부터 쳐야 하며 우선 노나라에 딸린 조그만 수(遂)나라를 치면 노나라를 두렵게 할 수 있고 그러면 송나라도 두려워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환공은 군대를 출동시켜 수나라를 공격하자 노나라 왕은 이 소식을 듣고 즉시 환공에게 사죄했으며 연이어 위나라와 조나라도 사죄했으며 환공은 이번에는 송나라를 칠 계획을 세우자 송나라 왕 역시 매우 두려워했으며 BC 678년 제나라 환공은 유(幽)에서 송, 노, 진(陳), 위 등의 나라와 회동함으로써 중원을 제패하고 패자가 됐다.
관중이 제시한 전략이 바로 약한 수나라를 공격함으로써 노와 송 양국을 제압하는 지상매괴(指桑骂槐)의 전략이었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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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계 투량환주(偸梁換柱) 대들보를 훔치고 기둥을 빼낸다.
병전계(幷戰計) 상황의 추이에 따라 언제든지 적이 될 수 있는 우군을 배반, 이용하는 적략이다.
제25계 투량환주(偸梁換柱) 대들보를 훔치고 기둥을 빼낸다.
제26계 지상매괴(指桑罵槐) 뽕나무를 가리키며 홰나무를 욕한다.
제27계 가치부전(假痴不癲) 어리석은 척 하되 미친 척 하지 마라.
제28계 상옥추제(上屋抽梯) 지붕으로 유인한 뒤 사다리를 치운다.
제29계 수상개화(樹上開花) 나무에 꽃을 피게 한다.
제30계 반객위주(反客爲主) 손님이 도리어 주인 노릇하다.
손자병법 제25계 투량환주(偷梁换柱) 대들보를 훔치고 기둥을 빼낸다.
투량환주는 제25계로 투천환일 즉 해와 달을 몰래 바꾼다라고도 하며 진짜를 몰래 가짜로 바꿔 목적을 이룬다는 뜻이다.
방연이 이 계책으로 손빈을 모함하자 금 선생이 같은 계략을 사용해 손빈을 구한다.
춘추(春秋) 말 전국(戰國) 초 시대 당시 북방의 강국이었던 제후국 진(晉)나라는 유력한 가신인 범(范)씨, 중항(中行)씨, 지(智)씨, 조(趙)씨, 한(韓)씨, 위(魏)씨의 육경(六卿)이 국정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 중에서 범씨와 중항씨는 먼저 멸망했고 나머지 네 사람이 세력 다툼을 벌이게 됐으며 그중 세력이 가장 강한 지씨인 지백(智伯)이 맹주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지백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나머지 세 사람에게 토지를 할양할 것을 요구했다.
한씨인 강자(康子)가 먼저 만호(萬戶)의 고을을 그에게 할양했고 그 뒤를 이어 위씨인 환자(桓子) 역시 이에 굴복해 만호의 고을을 할양했다.
자신을 얻은 지백은 조씨인 양자(襄子)에게 채고랑(蔡皐狼)의 땅을 달라고 요구했는데 이는 아예 가지고 싶은 땅을 지정해 요구한 것이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조양자는 그의 가신 장맹담(張孟談)과 숙의한 끝에 지백의 요구를 거절하자 조양자를 괘씸하게 생각한 지백은 자신의 군대는 물론 한강자와 위환자의 군대를 동원시켜 조양자를 공격했다.
한강자와 위환자는 싫었지만 지백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참했고 조양자는 진양성(晉陽城)으로 들어가 대항했다.
진양성은 일찍이 조양자의 아버지 조간자가 윤탁(尹鐸)이라는 사람으로 하여금 진양을 다스리게 하면서 세금을 가볍게 하고 선정을 베풀게 해 백성들의 민심을 산 곳이었으며 조간자는 평소에 아들 조양자에게 유사시에는 그곳에 가서 대책을 세우라고 일러 두었었다. 세 제후는 연합해 조양자의 성이 있는 진양을 공격했으나 조양자가 완강히 버티는 바람에 2년 동안이나 승리하지 못했다.
진양성은 지세가 움푹 팬 분지이므로 진수(晉水)의 물을 끌어들여 수공까지 했지만 조양자는 성문을 굳게 닫은 채 항복하지 않고 버텼다.
오랜 기간을 버티다가 막바지에 몰린 조양자는 이제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만 했는데 이때 조양자의 모사인 장맹담이 계책을 “한강자와 위환자는 어쩔 수 없이 지백을 따르고 있으니 이들을 잘 설득해 지백을 배반하고 우리와 연합하게 해 함께 지백을 공격하면 될 것”이라고 계책을 내 놓았다.
장맹담은 한강자와 위환자의 진영에 잠입해 이들을 설득했는데 “지백은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우리가 멸망하고 나면 지백은 바로 당신들을 칠 것이니 우리와 연합해 지백을 치고 땅을 공평하게 나누어 가지자는 계책에 한강자와 위환자는 장맹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들 세 제후는 진양성으로 흘러 들어오는 물길을 지씨의 땅으로 돌려 역으로 수공을 하기로 하고 군사를 동원해 밤새 제방을 파헤쳐 물꼬를 터 지백의 진영으로 흘러 들어가게 했다.
순식간에 지백의 진영은 물에 잠겼고 세 제후의 군대는 배를 이용해 공격해 들어갔다.
생각지도 않았던 공격을 받은 지백의 군대는 전멸을 당하고 말았으며 이들은 지백을 사로잡아 그 일족을 모두 처형하고 봉지를 나눴다.
이로써 진나라는 조씨의 조나라, 한씨의 한나라, 위씨의 위나라로 나뉘었는데 그래서 이 땅을 삼진(三晉)의 땅이라고 부르게 됐으며 이처럼 적을 매수해 우리 편으로 만드는 전략을 투량환주(偷梁换柱)라고 한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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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24계 가도벌괵(假道伐虢) 기회를 빌미로 세력을 키운다.
손자병법 제24계 가도벌괵(假道伐虢) 기회를 빌미로 세력을 키운다.
가도벌괵은 제24계로 길을 빌리는 계책을 쓴다는 뜻으로 적을 멸하거나 적의 요지를 탈취할 때 사용한다.
방연은 이 계책으로 한의 성고를 점령했고 이를 담보로 손빈을 요구한다.
공략 대상을 분단시켜 각개 격파하는 전략이다. 특히 일단 동맹을 맺어 이용한 뒤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공격해 멸망시키는 것도 가도벌괵에 해당한다.
춘추시대 우나라(虞)와 괵나라(虢)라는 두 소국은 진나라(晋)에 인접해 있었다.
진 헌공은 우나라에게 보물을 보내면서 괵나라를 공격하는 데 진나라 군대가 우나라를 통과하는 것을 허용토록 요구했다.
우나라의 궁지기라는 신하가 “괵나라가 망하면 우나라도 공격당할 수 있다”고 우려해 공개적으로 간언했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과연 괵나라가 멸망하자 우나라도 진나라에 공격당해 멸망하고 말았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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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23계 원교근공(远交近攻) 먼 나라와 사귀고 이웃 나라를 공격한다.
손자병법 제23계 원교근공(远交近攻) 먼 나라와 사귀고 이웃 나라를 공격한다.
원교근공은 제23계로 원교는 먼 나라와 동맹을 맺고 이웃 나라를 공격한다는 뜻으로 춘추전국시대 제후들은 이 계략을 사용해 적국의 동맹을 와해시키고 각개격파하여 세력을 확장 했다.
전국시대 후기에 모사 범휴가 전대의 모략을 정리하고 진 왕을 설득할 때 원교근공을 제시했는데 이 계략은 이렇게 해서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손빈은 원교근공으로 진과 한 등의 국가와 동맹을 맺고 국내 반란을 진압하여 수동적인 난국을 타개한다.
전국시대 위(魏)나라 사람 범수(范睢)는 위나라 중대부 수가(須賈)를 섬겼으나 오해를 받아 억울하게 목숨을 잃을 뻔했는데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장록(張祿)으로 이름을 고치고 진(秦)나라로 들어갔다.
당시 진나라의 소왕(昭王)은 재위 36년이나 됐지만 여전히 실권을 가지지 못했고 소왕의 어머니 선태후(宣太后)와 그녀의 동생인 양후(穰侯)와 화양군(華陽君) 그리고 소왕의 동생들인 경양군(涇陽君)과 고릉군(高陵君)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
양후는 재상으로 있으면서 국정을 전횡했고 나머지 세 사람은 번갈아 가며 군사권을 장악했으며 범수는 진나라에서 1년이란 세월을 특별한 일 없이 허송했지만 소왕의 근심거리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왕의 주변에 있다는 것을 정확하게 파악하게 됐다.
그러던 차에 범수가 기다리던 기회가 왔는데 당시 양후는 연(燕), 초(楚), 한(韓), 조(趙), 위 등 다섯 나라와 연합해 제(齊)를 격파하고 소왕에게 도읍(陶邑)을 봉지로 받았는데 도읍은 제나라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하여 양후는 한나라와 위나라를 지나 제나라의 강(剛)과 수(壽)를 쳐서 점령하고 이곳을 봉지로 받아 자신의 세력을 확대할 계획을 세웠다.
범수는 이 소식을 듣고 소왕에게 상서를 올려 이궁(離宮)에서 독대할 기회를 얻었고 소왕이 범수에게 여러 차례 가르침을 청하자 범수는 비로소 입을 열어 소왕에게 원교근공의 계책을 설명했다.
양후가 한과 위 두 나라를 지나 제나라의 강과 수를 친다는 것은 현명한 일이 아니며 적은 군사로는 제나라를 이길 수 없고 많은 군사를 보내면 진나라에 해가 되니 신이 왕의 계책을 생각해 보니 군사를 적게 내고 한나라와 위나라의 군사를 동원하려고 하는 것 같은데 이는 의가 아니며 지금 동맹국인 제나라와 친하지 않다고 남의 나라를 넘어가 공격하는 것이 옳겠는가?
그 계획에는 허점이 많으며 지난날 제나라의 민왕(涽王)이 남쪽으로 초나라를 공격해 군대를 깨뜨리고 장군을 죽여 영토를 천 리나 넓히려고 했지만 제나라는 척촌의 땅도 얻지 못했는데 어찌 땅을 얻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겠습니까.
형세가 땅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으로 제후들은 제나라가 지치고 왕과 신하 사이가 불화한 것을 보고 군사를 일으켜 제나라를 크게 깼으므로 장수는 욕을 당하고 군사들은 꺾이고 말았으므로 제나라가 크게 깨진 까닭은 초나라를 쳐 한나라와 위나라를 살찌게 만들었기 때문이며 이것은 이른바 적에게 군대를 빌려 주고 도둑에게 양식을 보내 준 것이라 하겠다.
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략하는 것이 나으며 한 치의 땅을 얻으면 전하의 촌토가 되고 한 자의 땅을 얻으면 전하의 척지가 되니 지금 이를 버리고 멀리 있는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라고 말했다.
소왕은 범수의 계책을 받아들였으며 범수를 객경으로 삼았고 그 후 소왕의 신임을 얻은 범수는 재상이 돼 응후(應侯)에 봉해졌고 그의 원교근공 계책은 천하 통일을 지향하는 진나라의 국시가 됐는데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범수채택열전(范睢蔡澤列傳)과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에 나온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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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22계 관문착적(关门捉贼) 문을 잠그고 도적을 잡다.
손자병법 제22계 관문착적(关门捉贼) 문을 잠그고 도적을 잡다.
관문착적은 36계 중 제22계로 역적을 한 곳으로 몰아 포위해 죽이는 방법으로 이는 마치 닭장을 잠그고 닭을 잡는 것과 같은 것으로 손빈은 이 계략을 이용하여 내란을 평정하고 제나라 군대를 재 충전할 시간을 확보한다.
조(趙)나라 혜문왕이 죽고 그 아들 효성왕(孝成王)이 즉위한 7년 후 진(秦)나라와 조나라 군대가 장평(長平)에서 마주쳤는데 그때는 조사(趙奢)도 죽고 인상여(藺相如)도 병이 무거웠으며 오직 염파(廉頗)만이 나라를 지키고 있었다.
조나라는 염파를 장군에 임명해 진나라 군대를 치게 했으나 염파는 자주 패했으며 염파의 군대는 방벽을 굳게 지키기만 할 뿐 싸우려 하지 않았고 진나라 군대가 여러 차례 도전해 와도 염파는 끝내 응전하지 않고 굳게 지키기만 했다.
진나라는 이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조나라의 명장 염파를 제거하지 않으면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염파를 제거하기 위해 첩자를 풀어 심리전을 펼쳤는데 “진나라가 걱정하는 것은 마복군(馬服君) 조사의 아들 조괄(趙括)이 장군이 되는 것”이라는 소문을 내 조나라 왕은 염파를 파면하고 조괄을 장군으로 삼았는데 인상여가 반대했다.
인상여는 “왕께서는 이름만으로 조괄을 쓰시려고 하는데 그것은 거문고 기러기발을 풀로 붙여 둔 채 거문고를 타려는 것과 같아 조괄은 다만 그의 아버지가 남긴 병법에 관한 전적(典籍) 혹은 저작(著作)을 읽은 것뿐으로 임기응변을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나 조왕은 듣지 않고 조괄을 장군으로 임명했는데 조괄은 소년 시절부터 병법을 배워 군사에 관한 이야기를 잘했고 천하에 병법가로서는 자기를 당할 사람이 없다고 자부했는데 일찍이 그의 아버지 조사도 함께 병법을 토론했을 때 조괄을 당해 내지 못했으나 조사는 아들을 칭찬한 적이 없었으며 조괄의 어머니가 그 까닭을 묻자 조사는 “전쟁이란 죽음의 땅인데 괄은 그것을 가볍게 말하며 조나라가 괄을 장군에 임명하는 일이 없다면 다행이겠지만 만약 그 애가 장군이 되면 조나라 군대를 망칠 자는 괄이 될 것”이라며 걱정을 했다.
조괄의 어머니는 아들이 출발하기에 앞서 왕에게 “처음 제가 그의 아비를 모셨을 때 마침 그의 아비는 장군이었기에 직접 먹여 살리는 부하가 몇 십명이나 됐고 친구는 몇 백명에 이르렀는데 대왕이나 왕족들에게 하사받은 상은 모조리 군리(軍吏)와 사대부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또한 출정 명령을 받은 날부터는 집안일을 전혀 돌보지 않았는데 지금 괄은 하루아침에 장군이 돼 높은 자리에 앉았으나 군리들 가운데 그를 우러러보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니 왕께서 내리신 돈과 비단을 가지고 돌아와 집에다 저장하고 이익이 될 만한 땅이나 집을 매일 둘러보며 사들이곤 하는데 대왕께서는 그 아비와 비교해서 어떻다고 생각하시며 아비와 자식이 마음 쓰는 것부터가 다르니 바라건대 왕께서는 그 아이를 장군으로 보내지 날라”고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왕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고 조괄의 어머니는 혹시라도 아들이 소임을 다하지 못할 경우가 생기더라도 자신을 자식의 죄에 연루시키지 말 것을 왕에게 간곡히 부탁했고 왕은 이를 수락했다.
조괄은 염파를 대신하자 군령을 모조리 뜯어고치고 군리들을 전부 갈아 치우자 진나라는 이 사실을 알고 극비리에 백전노장 백기(白起)를 상장군에 임명하고 백기가 장군이 된 사실을 발설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한다고 공포했다.
백기는 조나라의 군대를 한곳으로 모아 완전히 섬멸시킬 작전을 세우고 장벽(長壁)을 쌓아 진지를 구축했는데 바로 조나라 군대를 이곳까지 유인 몰살시키자는 관문착적(關門捉賊 문을 닫아걸고 도둑을 잡다)의 계책이었다.
조괄은 도착하자마자 마치 기선을 제압이라도 하려는 듯이 군대를 끌고 나와 진나라 군대를 쳤고 진나라 군대는 거짓으로 패해 달아나며 두 곳에 복병을 배치해 조나라 군대의 뒤를 끊게 했으며 조괄의 조나라 군대는 몇 번의 승리에 자만해 계략인 줄도 모르고 득의양양 승세를 몰아 달아나는 진나라 군대의 뒤를 쫓아 백기가 구축해 놓은 장벽까지 추격했으며 백기의 예상대로 함정에 빠지고 만 것이다.
이때 진나라의 복병 중 2만5000의 군사가 조나라 군대의 배후를 끊고 또 다른 5000의 기병이 조나라 군대와 선발대의 사이를 끊어 식량 보급로를 차단하고 계속되는 진나라 군대의 맹공으로 퇴로를 차단당한 조나라 군대는 그 자리에 진지를 구축하고 공격에서 수비로 전환하고 구원병이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진나라 소왕(昭王)은 이 소식을 듣자 몸소 하내(河內)로 거동해 그곳 주민들에게 벼슬을 내리거나 진급을 시킨 다음 15세 이상의 장정들을 전원 징발해 장평으로 보냈는데 이들의 임무는 조나라의 원군을 막아 식량 보급을 계속 차단하는 것이었다.
조나라 군대는 46일 동안 포위돼 있었으며 보급을 받지 못한 지가 오래돼 식량이 떨어지자 조나라 군대는 급기야 몰래 서로 죽여 사람 고기를 먹고 버티는 형국에 이르렀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조괄은 마지막으로 직접 정예부대를 앞세우고 포위망을 뚫기 위해 선두에 서서 싸웠으나 진정 장한 것은 의기(意氣)뿐 조괄은 분전 끝에 진나라 병사의 활에 맞아 죽고 말았다.
조괄의 군사 40만명은 전원 무장을 해제하고 백기에게 항복했으며 백기는 이번 기회에 후환을 없애 버리겠다는 생각으로 항복한 조나라 군사를 속임수를 써서 모두 구덩이에 처넣어 죽여 버리고 어린 아이 240명만을 남겨 조나라로 돌려보냈는데 BC 260년의 일이었다.
조괄의 어머니는 벌을 받지 않았는데 조왕이 앞서의 약속을 지킨 것으로 조나라는 이 몇 차례의 싸움에서 무려 45만이나 되는 군사를 잃었다.
이듬해 진나라는 다시 조나라를 공격해 수도 한단을 포위했지만 조나라가 당장 망할 운명은 아니었는지 초나라와 위나라의 도움으로 겨우 위기를 넘겼으며 그 후에도 상당 기간을 버티다가 BC 228년에 진나라의 장군 왕전(王翦)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사기(史記) 염파인상여열전(廉頗藺相如列傳)에 나온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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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제21계 금선탈각(金蝉脱壳) 매미처럼 허물을 벗다.
손자병법 제21계 금선탈각(金蝉脱壳) 매미처럼 허물을 벗다.
금선탈각은 제21계로 겉모습은 그대로 두고 본체만을 바꿔 적을 속이는 것을 의미한다.
손빈은 이 계책을 이용해 제 나라의 하인을 자신으로 위장 잠입케 한 후 위를 벗어나 탈출하게 된다.
남송(南宋) 영종(寧宗) 때, 금(金)나라가 중원을 침범했는데 남송의 명장 필재우(畢再遇)는 금나라 군대를 맞아 싸워 크게 이겼지만 수적으로 우세에 있는 금나라 군대가 수만 명의 기병을 앞세워 송나라 진영을 겹겹이 포위하자 수적으로 약세에 몰린 송나라 군대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맞서 싸우자니 적군이 너무 강했고 후퇴하자니 추격을 당할 것이 두려웠으며 필재우는 고심 끝에 묘안을 찾아냈다.
금나라 군대는 우선 적진을 파악한 후 다음 날 아침 공격하기로 하고 송나라 진영의 동태에 주의를 기울였다.
그런데 한밤중에 송나라 진영에서는 일제히 북소리가 울리며 군기가 펄럭이자 금나라 군대는 송나라 군사가 공격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전군이 공격을 준비했다.
그러나 송나라 진영에서는 북소리만 끊임없이 울릴 뿐 군마는 나오지 않았으며 이런 식으로 송나라 군대는 사흘 연속 북을 울려 댔다.
금나라 군대는 송나라의 허장성세 전법으로 생각하고 말았다.
북소리가 약해지자 금나라 군대는 비로소 송나라 진영으로 진격해 들어갔는데 송나라 군대는 이미 철수를 하고 없었다.
이처럼 감쪽같이 도망하는 것을 이르러 금선탈각(金蝉脱壳)이라 한다.
편집국 편집장
2018-0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