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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대학교 갤러리에서 ‘설총식 초대전’ 개최
[굿타임] = 이강부 기자 = 호서대학교는 봄을 맞아 은유로 상상하다라는 주제로 아산캠퍼스 중앙도서관 갤러리에서 설총식 초대전을 5월 30일까지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생존의 관계망과 부조리한 현실을 동물인간 캐릭터로 풍자한 설총식 작가의 작품이 소개되며 이를 통해 현실에서 만나게 되는 자신의 모습, 사회에서 마주치는 모습, 국가와 국가 간의 모습 등 작가가 표현하는 다양한 인간군상을 만나볼 수 있다.
주요 작품은 작가의 밤에 창작하는 모습을 부엉이와 초승달에 비유해 형상화한 Artist, 남녀의 삼각관계를 늑대와 여우에 비유한 한 여자 두 남자, IMF시절의 명퇴 예정자를 고릴라에 빗대어 표현한 자리 만들기, 자신과 사회 속에서 겪게 되는 갈등 상황을 박쥐에 빗대어 표현한 Someone′s Shape of inside 그리고 6개국 간의 상황을 각국의 크기와 위치 이미지에 비유해 표현한 6자 회담, 남극처럼 제한된 곳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펭귄에 비유해 탐험의 욕망을 표현한 탐험 등을 감상할 수 있다.
호서대학교는 매년 국내외 유명작가의 기획전시를 통해 문화적 인프라가 부족한 지역사회에 문화적 공간을 제공하고 있으며 지역주민과 외부 방문객들을 위해 토요일에도 무료로 개방하고 있다.
또 중앙도서관은 작가와 관람객의 소통과 작품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5월 1일 작가와의 대화시간을 준비하고 있다.
이장훈 중앙도서관장은 “이번 전시는 도서관이 복합문화공간인 학술정보관으로 개관하고 기획한 10번째 전시로 설총식 작가가 표현하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통해 오늘도 숨 막히게 달려가는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편집국 편집장
2018-0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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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우리나라의 조서제도
우리나라의 조서제도는 1954년 형사소송법 제정시에 도입되어 현재까지 큰 변화 없이 이어져오고 있다.
지난 2월 법무·검찰개혁위원회는 몇몇 개혁의제를 발표했다.
그런데 조서제도는 ‘증거법 차원의 문제’이지 ‘검찰개혁과는 무관’하다는 이유로 개혁의제에서 빠졌다.
반면, 현재 국회에 계류중인 형사소송법 개정법률안 여섯 건(금태섭, 오신환, 박범계, 이동섭, 표창원, 김석기 대표발의)은 공히 현행 조서제도를 개혁대상에에 포함시켰다.
같은 시대에 같은 이슈를 논의함에 있어 법무·검찰개혁위원들과 국회의원들 간에는 왜 이와 같이 극명한 입장차가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나라의 조서제도는 수사과정에서 수사대상자의 진술을 문답식 조서에 기록한 후 재판과정에서 그 조서를 피고인에 대한 유무죄 판단의 증거로 사용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즉, 문답식 조서를 작성하고, ‘그리고’ 그 조서에 증거능력을 부여하는 것이 우리나라 조서제도의 핵심이다.
이와 같은 제도 하에서는 수사기관에서 작성한 조서가 재판의 결과를 좌우할 우려가 크다.
그래서 형사소송법은 피고인이 조서의 내용을 부인하면 증거로 쓸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경찰이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의 경우에만 말이다.
반면,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는 피고인이 그 내용을 부인하더라도 증거로 쓸 수 있다.
비교법적으로 수사대상자의 진술을 기록하는 방식은 크게 조서나 보고서 등의 서면에 기록하는 방식, 녹음물이나 영상물 등의 매체에 기록하는 방식, 양자를 병행하는 방식으로 나뉜다.
다음으로 이와 같이 생산된 진술기록을 활용하는 방식은 피고인의 혐의유무를 판단할 직접 증거로 삼는 방식과 피고인 진술의 신빙성을 다툴 간접 증거로 삼는 방식으로 나뉜다.
그런데 영상물이 없는 상태에서 수사대상자의 진술을 기록한 조서를 직접 증거로 인정하는 나라는 우리나라와 일본뿐이다.
그나마 일본은 우리나라와 같은 문답식 조서가 아니라 진술서 형태의 공술조서를 작성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경찰조서와 검사조서에 대한 차별도 없다.
진술을 서면에 기록하게 되면 각종 오류가 필연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관련 연구에 의하면 경찰이 작성한 피의자신문조서에는 다양한 종류의 왜곡이 존재했다.
검사의 피의자신문조서를 직접 분석한 연구는 없지만 국내외의 관련 연구에 의하면, 검사가 작성한 조서도 경찰의 조서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세칭 ‘309동 성폭행 사건(경찰조서의 왜곡)’이나 ‘오산시장 뇌물수수 사건(검사조서의 왜곡)’은 이를 증명하는 좋은 예다.
이와 같은 왜곡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지만, 경찰이 작성한 조서는 재판과정에서 “아니요.” 한 마디면 무력화되기 때문에 사후 차단은 가능하다.
반면, 검사가 작성한 조서는 재판과정에서 “아니요.”라고 말해도 쉽게 무력화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보다 치명적이다.
Leo와 Davis는 형사절차에 관여하는 어느 누구도 터널시야와 확증편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고 했다.
터널시야는 ‘특정한 대상에 선택적으로 집중하고 다른 대상은 배제하는 경향’을 말하고, 확증편향은 ‘자신의 신념과 기대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증거를 탐색, 생산, 해석하는 경향’을 말한다.
이러한 마인드 버그는 인류의 시작과 함께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조서제도는 이와 같은 마인드 버그에 매우 취약하다.
문답식 조서는 물은 것과 답한 것을 그대로 기록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조서를 보는 사람의 의사결정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지만, 실상 문답과 문답 사이사이에는 신문자의 터널시야와 확증편향에 의해 제거된 수많은 문답과 정보과 숨겨져 있다.
이는 개인의 역량과 자질을 향상시킨다고 해서 근원적으로 해결될 문제가 결코 아니다.
1954년 형사소송법이 제정될 즈음 국회 법사위 엄상섭 위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경찰관이나 검찰관이 만든 조서에 대하여 증거능력을 주지 말아야 한다. 피고인이나 변호인 측에서 이의가 없는 한에서만 유죄의 증빙재료로 해야 한다. 이러한 방향으로 나가야 될 것이지만 우선 경찰관의 조서만 그렇게 하고 검찰관의 조서는 증거능력을 주기로 ‘절충’하여 규정했다.”
64년 전부터 우리 입법자들은 현재 국회에 계류중인 형사소송법 개정법률안을 발의한 국회의원들과 뜻을 같이 하고 있었다.
다만,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여 이를 후대의 과제로 남겨 두었다.
따라서 여섯 건의 개정법률안은 만시지탄이지만 환영할 일이고, 법무·검찰개혁위원회의 개혁의제에서 조서제도가 빠진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아산경찰서 수사과장 경정 이형근
편집국 편집장
2018-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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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원조
차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중국인들이 마시는 차는 종류는 매우 다양해 전체를 다 다룰 수는 없지만 이미 우리에게 알려진 차에 대해 기본적인 상식을 나열하고자 한다.
차를 녹차, 황차, 청차(우롱차), 백차, 홍차, 흑차 이렇게 여섯 종류로 나누는 것은 중국에서 시작된 고전적인 분류법으로 이 여섯 가지 차는 기본적으로 카멜리아 시넨시스(Camellia Sinensis)라는 종명을 가진 차 나무의 싹과 잎으로 만들어진다.
일반적으로 녹차 나무와 홍차나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며 단일 종의 차 나무 잎으로 만드는데 여섯 종류의 다른 차가 만들어지는 것은 생 찻잎을 완성된 찻잎으로 변화시키는 가공 과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한 그루의 차 나무에서 채엽한 잎을 가공 방법만 달리해서 여섯 종류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조금 더 들여다보면 찻잎의 어느 부분을 채엽하는가, 언제 채엽하는가, 살청을 하는가, 위조(萎凋) 즉 시들리기 과정이 있는가, 있다면 어떻게 하며 얼마나 길게 하는가, 유념은 어떻게 하는가, 산화 과정은 있는가, 있다면 얼마나 지속 하는가 등의 가공방법 차이가 녹차, 백차, 황차, 우롱차, 홍차, 흑차 등 다른 모습을 빚어내는 것이다.
우리가 차로 마시기 위한 차로 만들기 위해 채엽하는 차 나무에는 중국 소엽종인 카멜리아 시넨시스 시넨시스(Camellia sinensis var. sinensis), 아삼 대엽종인 카멜리아 시넨시스 아사미카(Camellia sinensis var. assamica)과 카멜리아 시넨시스 캄보디에니스(Camellia sinensis var. cambodiensis) 세 가지 주요 품종이 있다.
이들 차 나무의 특징을 보면 중국 소엽종은 자연 상태에서 5~6미터까지 자라며 찻잎 크기는 5cm쯤 되고 관목 형태로 작은 줄기가 덤불져 있으며 우리나라 보성이나 하동에서 볼 수 있는 차 나무는 거의 모두 소엽종이다.
아삼 대엽종은 자연 상태에서 10~15m쯤 자라고 찻잎도 크게는 20cm에 이르는 굵은 기둥의 교목이며 캄보디에니스 종은 주로 교배종을 만들기 위해 사용되며 교목으로 약 5m까지 자란다.
이런 분류는 아주 기본적인 것으로 현재는 이들 품종 사이의 자연 교배로 발생한 품종과 인공 교배를 통한 품종 개량의 결과로 여기에 속하지 않는 많은 새로운 품종이 존재하고 있다.
이렇듯 차나무의 키는 크게 자라지만 우리가 차밭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은 어른 허리께쯤 되는데 이것은 찻잎 따기를 수월하게 하고 찻잎의 수확량 증대를 위해 지속적으로 전지를 해서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찻잎 크기 또한 만들고자 하는 차의 종류나 성질에 따라 채엽 시기가 다르며 일반적으로 최대치보다는 훨씬 작은 상태에서 채엽된다.
그러나 중국 윈난(雲南)성에서 찻잎을 따는 모습을 보면 키가 아주 큰 차 나무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런 것은 전지를 하지 않고 야생 상태에서 자란 차나무며 우리나라 하동에도 수령이 약 1000년으로 추정되는 차나무가 있는데 그 키는 4m가 넘는다.
동일한 차나무의 찻잎으로 여섯 종류의 차를 만드는 과정을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각 차의 종류에 더 적합한 품종이 있는데 대엽종인 아삼종으로도 홍차와 녹차를 만들 수 있고, 소엽종인 중국종으로도 홍차와 녹차를 만들 수 있지만 아삼종으로는 홍차를, 중국종으로는 녹차를 만들었을 때 맛과 향이 더 뛰어나다.
이것은 아주 일반론적인 이야기일 뿐 현재는 아삼종과 중국종의 교배종을 포함한 수많은 품종이 있으며 위의 세 품종을 기본으로 자연적으로 발생한 수많은 하위 품종(subvarity)과 이 셋을 교배해 인위적으로 개발된 수 많은 품종(cultivar)이 있다.
컬티바라는 용어는 개발된 품종(cultivated variety)의 축약으로 교배나 돌연변이로 나타난 품종 중에서 품질이 뛰어나 대량 재배용으로 선택된 것을 말한다.
백차를 만들 때 사용되는 싹이 큰 대백종이나, 다양한 맛과 향을 품고 있는 우롱차의 품종이 모두 카멜리아 시넨시스라는 차나무의 하위 품종이거나 개발된 품종들이다.
다르질링이나 아삼과 같은 홍차 산지에서 지금도 교배를 통해 수많은 품종이 만들어져 새로운 맛과 향의 홍차가 소개되고 있으며 이렇게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컬티바 가운데 우수한 맛과 향을 지닌 것은 이와 똑같은 품종을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 씨앗이 아닌 꺾꽂이를 통해 묘목장에서 대량으로 재배하고 있는데 이들을 복제종(clonal varieties)이라 한다.
편집국 편집장
2018-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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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십장(九遷十葬)
직역하면 아홉번 옮겨 열번째 장사지낸다는 뜻으로 조상의 무덤을 쓸 때 지나치게 욕심에 어두운 경우를 일컫는 구천십장(九遷十葬)은 대동기문(大東奇聞)에서 볼 수 있다.
조선 중기에 경북 울진 출신으로 격암(格庵) 남사고(南師古)라는 분이 있었는데 그는 풍수, 천문, 점술, 관상에 능통했는데 그가 우주의 오묘한 비법을 터득하게 된 일화가 있다.
젊은 시절, 울진 불영사(佛影寺)로 가던 길에 바랑을 메고 서 있는 어떤 중을 만났는데 그 중이 남사고가 탄 말에다 자신의 바랑을 실어줄 것을 부탁하자 남사고가 이를 허락했다.
남사고와 중이 함께 불영사에 도착해서 부용봉에 노닐다가 소나무 아래에서 내기장기를 두는데 중이 갑자기 기합소리와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가 한참 뒤에야 땅으로부터 코끝이 보이더니 점차 온몸을 나타냈다.
중이 묻기를 ‘무섭지 않더냐?’하니 남사고는 ‘무서울 것이 뭐 있겠소?’라고 대답했다.
중은 ‘내가 많은 사람에게 시험을 해 보았으나 모두 겁을 먹고 기절을 했으나 그대만은 이토록 대담하고 침착하니 내 비로소 가르칠 사람을 구했다’하고는 비법을 적은 책을 주며 ‘그대는 기골이 범상치 않으니 부디 힘쓰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이때부터 남사고는 비법이 적힌 책을 열심히 연구해 우주의 오묘한 이치를 꿰뚫어 알 수있게 됐다고 한다.
남사고는 명종의 뒤를 이은 선조의 등극을 점쳤고 임진왜란이 발발할 것도 미리 알고 있었으며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당쟁이 시작될 것도 예언했다.
하지만 설화 속에 나타나는 남사고의 이미지가 반드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는데 한 번은 부모의 장례를 위해 여기저기 길하다는 땅을 골라 장사지냈으나 장례를 치른 뒤에 부모님의 묘소를 딱 보니 자신의 마음에 도무지 차지 않았다.
그래서 길지(吉地)를 골라 여러 번 무덤을 옮기다가 마침내 한 묘 터를 얻었는데 바로 날으는 용이 하늘에 오르는 비룡상천(飛龍上天) 형세였다.
남사고는 크게 기뻐하며 이곳에 이장(移葬)을 하고 흙을 져다 봉분을 만드는데 어디선가 한 일꾼이 이런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아홉번 옮겨 열번째 장사지낸(九遷十葬) 남사고야 이 자리가 비룡상천하는 명당인 줄 알지 마라 죽은 뱀이 나무에 걸린(枯死掛樹) 자리가 여기가 아니더냐.
남사고가 이 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서 다시 산천의 형세를 찬찬히 살펴보니 과연 날으는 용이 하늘에 오르는 형세가 아니라 죽은 용의 형세였다.
정신을 차린 남사고는 그 노래를 부른 일꾼을 급히 찾았으나 일꾼은 홀연히 사라져 버려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에 남사고는 ‘땅도 각자 주인이 있는 법이니 인력만으로는 안 되는 것’이라며 탄식을 하고 해(害)나 없을 땅을 골라 이장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 고사에서 풍수지리에 아주 능통하면서도 정작 자기 아버지 무덤을 쓸 때에는 어떻게 하면 후손들이 발복(發福)을 누릴 수 있을까 하는 욕심에 눈이 어두워 아홉번 이장하고 열번 무덤을 쓰게 되는 한 인간의 어리석음을 보았다.
오늘의 한자
九 : 아홉 구, 遷 : 옮길 천, 十 : 열 십, 葬 : 장사지낼 장
편집국 편집장
2018-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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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현서원, ‘반반한’ 문화공간으로 거듭나다
[굿타임] = 이강부 기자 = (재)충남역사문화연구원은 문화재청과 충남도와 공주시 공모사업인 2018년 향교 서원 문화재 활용사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올해로 5년차를 맞이하는 충현서원 활용사업을 통해 충남 최초의 서원에 대한 도민의 관심과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고 충청유교의 저변 확대에 기여한 공로가 인정돼 2015년에는 문화재청 문화재활용 우수사업으로 선정된 바 있다.
올해 충현서원 활용사업은 지자체와 정부의 문화정책을 적극 반영하고 도민에게 양질의 역사 문화향유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기존 프로그램인 일인일색 화요사랑방, 유 불 아름다운 만남, 충현서원 문화제 외에 꼬무락 꼬마선비, 박약당 인성교실, 충현서원 학술대회 등을 추가해 총6개의 프로그램을 운영할 계획이다.
매년 호평을 받아온 일인일색 화요사랑방은 지역출신 명사를 초청해 진솔하고 소박한 화법으로 정담을 나누는 시간과 문화예술 공연이 어우러진 토크 콘서트로 진행된다.
유 불 아름다운 만남은 다양한 문화유산 체험을 즐길 수 있도록 충현서원과 갑사, 도예촌 탐방을 연계 운영해 가족단위 여행객의 참여 만족도가 높은 프로그램으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10월에 개최 예정인 충현서원 문화제는 소통과 화합의 한마당이라는 슬로건을 필두로 지역민의 자발적인 참여가 돋보이는 마을 축제다.
꼬무락 꼬마선비와 박약당 인성교실은 청소년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최근 인성교육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증대되고 있으며 전국의 초중고등학교에서 바른 인성을 강조하고 있으며 바른 인성은 더불어 사는 사회의 필수 아이템이자 글로벌 인재의 자격요건이기도 하다.
충남도역사문화연구원은 인성 키워드를 배움반 재미반, 창의반 기술반이라는 의미를 담은 반반과 조합해 서원에서 체험하는 반반한 인성교육이 실현될 수 있도록 운영해 나갈 계획이다.
또 충청지역 유교문화 콘텐츠 발굴과 유교문화유산의 종합적 활용을 위한 학술적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충현서원 학술대회를 준비하고 있으며 학술대회를 계기로 도내의 향교와 서원 활용해 단체 간의 연대와 협력 관계 증진을 도모하고 유교문화유산 활용사업의 발전 방향과 방법론을 공유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편집국 편집장
2018-0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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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득인(求仁得仁)
인을 구해 인을 얻음을 뜻하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음을 말하는 구인득인(求仁得仁)은 사기(史記)에서 볼 수 있다.
은(殷)나라의 고죽군(孤竹君)은 세상을 떠나면서 왕위를 형인 백이(伯夷)보다도 지도력이 있다고 생각되는 동생 숙제(叔齊)에게 물려준다고 했다.
그렇지만 숙제는 장남인 형이 왕위를 계승해야 된다며 사양했고 백이는 부왕의 유언을 따르는 것이 자식된 자의 도리라며 그대로 궁궐을 나왔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된 숙제 역시 그 나라를 떠났다.
그러던 어느 날 백이와 숙제는 약속이나 한 듯이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이 노인들을 공경하는 덕 있는 사람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를 섬기기 위해 찾아갔다.
그러나 이들 형제가 도착하기 전에 문왕은 죽고 아들 무왕(武王)이 그 뒤를 잇고 있었는데 무왕은 선왕의 유언에 따라 은나라 주왕(紂王)을 토벌하려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백이와 숙제는 무왕을 만류하며 ‘부왕의 장례도 아직 치르지 않았는데 무기를 들고 전쟁을 하는 것은 아들 된 자의 도리가 아니며 게다가 지금 토벌하려는 사람은 황제로 황제가 아무리 포학할지라도 모반을 하는 것은 신하된 자의 도리가 아니니 토벌을 멈추라고 말했다.
그러나 무왕은 자신의 계획을 포기할 수 없었으므로 군사의 출정(出征)을 명했다.
그러자 백이와 숙제는 그 앞을 가로 막았고 무왕은 노해 이들을 죽이려고 했는데 그때 마침 강태공(姜太公)이 나서 변호를 해 두 사람은 석방됐다.
무왕은 출정해 승리를 거두었고 천하를 통일해 호경에 도읍(都邑)을 세웠으며 백성들은 포학한 정치로부터 해방돼 기뻐했다.
그렇지만 백이와 숙제는 무왕의 행위를 비판하며 주나라 땅에서 나는 것은 그 무엇도 먹지 않겠다고 결심하고는 서우양산(首陽山)으로 들어가 고사리를 캐먹고 살다가 굶어죽었다.
공자는 이들의 행동을 두고 ‘백이와 숙제는 자신들이 인을 구하려고 해 인을 얻었으니(求仁得仁) 무슨 원한이 있겠는가’하고 평가하고 있다.
오늘의 한자
求 : 구할 구, 仁 : 어질 인, 得 : 얻을 득, 仁 : 어질 인
편집국 편집장
2018-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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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茶)
차(茶)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차(茶)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중국(中國)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식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차(茶)를 종류별로 살펴보면 경우에 따라서 6대 분류 또는 3대 분류로 나누고 있으며 여기서는 6가지로 분류를 해 보고자 한다.
6가지로 분류해서 찻잎이나 차를 우린 수색(水色)에 따라 백차(白茶), 황차(黃茶), 청차(靑茶), 녹차(綠茶), 홍차(紅茶), 흑차(黑茶)로 구분하는데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분류법이다.
따라서 우리가 차를 우려 마시기 위해 가공한 찻잎이나 수색(水色)이 흰색에 가까운 것을 백차라 하며 황차는 누르스름하고, 청차는 흔히 우롱차라고도 부르는데 짙은 녹색이고, 녹차는 우리가 일상에서 가장 많이 접했던 것이고, 홍차는 찻잎은 검은색에 가까운데 수색이 붉고, 흑차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보이차인데 충분히 오랜 시간동안 발효된 차는 검은색에 가까우며 그래서 흑차라고 하며 보이차를 처음 만들었을 때 발효 과정을 거치지 않은 생차의 경우 짙은 녹색이다.
또 발효도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하는데 불발효(不), 반발효(半), 전발효(全)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이를 3대 분류라 한다.
불발효는 전혀 발효하지 않은 차로 전혀 발효하지 않았다고 해도 가공 중에 조금 발효될 수밖에 없지만 이를 무시하고 발효하지 않은 찻잎은 원래의 찻잎 색 그대로인 녹색을 유지하고 있어서 불발효 차를 녹차라고 한다.
그런데 발효라고 하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은 표현이라는 학설도 있으며 찻잎의 발효는 산화가 보다 정확한 표현이지만 이미 굳어진 표현이라 그냥 발효라고 표현하는 것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으로 발효라는 의미는 미생물의 작용에 의해서 유기물이 분해돼 인간에게 유용한 물질이 생성되는 현상을 말한다.
다시 말해 차의 발효(산화)는 찻잎에는 미생물이 없으며 대신 찻잎의 폴리페놀 성분이 산화효소(폴리페놀 옥시디아제)에 의해 녹색의 엽록소가 황색과 홍색으로 변하며 독특한 향과 맛을 내는데 이를 발효라 하긴 어렵고 산화라는 표현이 적절하지만 관례상 발효라고 한다.
대표적인 불발효차는 녹차를 들 수 있으며 전발효 차는 홍차를 나머지는 반발효 차라고 생각하면 된다.
불발효차인 녹차를 만들 때 찻잎을 가마솥에서 뜨거운 불에 덖는데 이것이 바로 산화효소를 죽이는 작업이며 이를 살청(殺靑)이라고 하는데 이렇게 하면 더 이상 산화(발효)가 일어나지 않아 처음 상태 그대로의 맛과 향을 유지할 수 있다.
서호용정, 벽라춘, 죽엽청, 황산모봉 등이 이에 해당하며 중국 사람들이 가장 즐기는 차로 중국 차 생산량의 70% 정도가 녹차며 녹차 중에 대표적인 차가 황산모봉 이다.
반발효차는 찻잎을 햇빛이나 실내에서 시들린 후 비비거나 휘저어 찻잎 속의 성분 일부를 산화시킨 것으로 찻잎에 상처를 줘서 산화를 시키면 독특한 향이 나는데 그래서 반발효차인 청차는 향이 매우 뛰어나다.
철관음, 대만우롱차, 봉황단총, 무이암차(대홍포, 육계, 수선) 등이 모두 반발효 청차에 속하고 청차를 우롱차라고 말하기도 하며 청차의 한 종류인 우롱차도 있지만 청차 전체를 가리켜 우롱차라고 하기도 하며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대표적인 청차는 대만우롱차다.
백차는 반발효차 이긴 하지만 찻잎을 따서 시들렸다가 건조해서 만들며 공정이 매우 간단한데 비해 그만큼 향과 맛을 내기가 힘들며 백호은침, 백모단(백모란)이 가장 대표적이다.
전발효차인 홍차는 찻잎을 솥에다 덖는 과정이 없고 찻잎을 비벼서 상처를 준 다음 산화되도록 그대로 놓아두었다가 완전히 발효된 다음에 말리면 그것이 홍차며 정산소종, 기문홍차, 전홍(운남홍차) 등이 유명하다.
그러나 분류하기 좀 애매한 것은 흑차와 백차의 경우로 흑차는 녹차를 만드는 과정과 비슷해서 처음 만들었을 때는 녹차에 가까운 불발효차에 가까우나 살청을 약하게 했기 때문에 그 상태로 시간이 지날수록 발효가 일어나서 후발효차라고 하며 다른 차들은 차를 만들 때 이미 발효 과정을 거친 후 완성품이 만들어지는데 보이차와 같은 흑차는 차를 다 만든 다음에 발효가 일어난다.
흑차의 발효 속도를 빠르게 하기 위해 인공으로 발효하기도 하는데 그런 과정을 거친 차를 숙차(熟茶)라고 하며 보이차 중에는 생차(生茶)가 있고 숙차(熟茶)가 있으며 생차는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를 더해 가격이 많이 올라가는 반면 숙차는 처음부터 충분히 발효시켜 나온 차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가격 차가 크지 않으며 숙차를 만드는 핵심 기술은 비밀로 하고 있다.
황차도 후발효차로 녹차를 잘못 만들면 황차가 되는 수가 있으며 녹차를 만들다가 살청(솥에 덖는 과정) 온도가 낮은 상태로 해 오래 방치해 두면 황차가 되며 예전엔 잘못 만든 녹차, 하급차로 취급했는데 특유의 맛과 향이 있어 당당하게 6대 분류 중 하나에 속하게 됐으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군산은침과 곽산황아가 있다.
백차, 황차, 청차 모두 반발효차나 진정한 의미의 반발효차는 청차라고 할 수 있으며 백차는 거의 녹차에 가깝고 황차는 약발효된 차니 반발효차라고 해도 그 반(半)의 의미가 50%가 아니라 불발효차와 전발효차가 아닌 모든 차를 그냥 반발효차라고 부른다.
차의 종류별 대표적인 차는 녹차는 서호용정, 벽라춘, 백차는 백호은침, 백모란, 청차는 우롱차, 철관음, 무이암차, 대홍포, 홍차는 정산소종, 기문홍차, 전홍, 황차는 군산은침, 흑차는 보이차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자스민차와 같은 화차를 재가공차라고 부르며 자스민차는 녹차나 홍차에 자스민(말리화茉莉花) 향기를 첨가한 차를 말한다.
따라서 중국차는 위에서 말한 6대 차 외에 재가공차를 추가해 일곱 가지로 분류하면 그 안에 모든 중국차를 포함할 수 있다.
편집국 편집장
2018-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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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우일모(九牛一毛)
아홉 마리의 소 가운데서 뽑은 한 개의 소 털이라는 뜻으로 많은 것 중에 가장 적은 것을 비유한 구우일모(九牛一毛)는 한서(漢書)의 보임안서(報任安書)와 문선(文選)의 사마천 보임소경서(司馬遷 保任少卿書)에서 볼 수 있다.
한(漢)나라 7대 황제인 무제(武帝) 때 5000명의 보병을 이끌고 흉노(匈奴)를 정벌하러 나갔던 이릉(李陵) 장군은 열 배가 넘는 적의 기병을 맞아 초전 10여 일간은 잘 싸웠으나 결국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듬해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는데 난전(亂戰)중에 전사한 줄 알았던 이릉이 흉노에게 투항해 후대를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 안 무제는 크게 노해 이릉의 일족(一族)을 참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그러나 중신을 비롯한 이릉의 동료들은 침묵 속에 무제의 안색만 살필 뿐 누구 하나 이릉을 위해 변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를 분개한 사마천(司馬遷)이 그를 변호하고 나섰다.
사마천은 지난날 흉노에게 경외(敬畏)의 대상이었던 이광(李廣) 장군의 손자인 이릉을 평소부터 목숨을 내던져서라도 국난(國難)에 임할 용장(勇將)이라고 굳게 믿어 왔기 때문이다.
그는 사가(史家)로서의 냉철한 눈으로 사태의 진상을 통찰하고 대담하게 무제에게 “황공하오나 이릉은 소수의 보병으로 오랑캐의 수만 기병과 싸워 그 괴수를 경악케 했으나 원군은 오지 않고 아군 속에 배반자까지 나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패전한 것으로 생각되며 끝까지 병졸들과 신고(辛苦)를 같이한 이릉은 인간으로서 극한의 역량을 발휘한 명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며 그가 흉노에게 투항한 것도 필시 훗날 황은(皇恩)에 보답할 기회를 얻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으로 사료되오니 차제에 폐하께서 이릉의 무공을 천하에 공표하시오소서”하고 아뢰었다.
무제는 진노해서 사마천을 투옥(投獄)한 후 궁형(宮刑)에 처했다.
세인(世人)은 이 일을 가리켜 이릉의 화(李陵之禍)라 일컫고 있는데 궁형이란 남성의 생식기를 잘라 없애는 것으로 가장 수치스런 형벌이었다.
사마천은 이를 친구인 임안(任安)에게 알리는 글(報任安書)에서 최하급의 치욕이라고 적고 이어 착잡한 심정을 ‘내가 법에 따라 사형을 받는다고 해도 그것은 한낱 아홉 마리의 소 중에서 터럭 하나 없어지는 것(假今僕伏法受誅, 九牛亡一毛)과 같을 뿐이니 나와 같은 존재는 땅강아지나 개미 같은 미물과 무엇이 다르겠나?
그리고 세상 사람들 또한 내가 죽는다 해도 절개를 위해 죽는다고 생각하기는커녕 나쁜 말하다가 큰 죄를 지어서 어리석게 죽었다고 여길 것이라고 쓰고 있다.
사마천이 수모를 당하면서까지 살아가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당시 사마천은 태사령(太史令)으로 봉직했던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이 임종하면서 통사(通史)를 기록하라고 한 유언에 따라 사기(史記)를 집필 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기를 완성하기 전에는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몸이었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중국 최초의 사서(史書)로서 불후(不朽)의 명저(名著)로 꼽히는 사기130여권이 완성돼 오늘에 전해지고 있다.
오늘의 한자
九 : 아홉 구, 牛 : 소 우, 一 : 한 일, 毛 : 털 모
편집국 편집장
2018-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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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병필패(驕兵必敗)
강병을 자랑하는 군대나 싸움에 이기고 뽐내는 군사는 반드시 패한다는 뜻으로 교만(驕慢)하게 굴면서 상대(相對)를 얕보는 자는 반드시 패함을 비유한 교병필패(驕兵必敗)는 한서열전(漢書列傳) 위상전(魏相傳)에서 볼 수 있다.
전한(前漢)의 선제(宣帝)가 서역(西域)의 차사국(車師國)을 정복하기 위해 정길(鄭吉)과 사마희에게 출병을 명하자 두 사람은 대군을 이끌고 차사를 공격해 들어갔다.
그러자 다급해 진 차사왕은 개노국에 구원병을 요청했지만 개노국이 구원병을 보내주지 않자 할 수 없이 항복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개노국의 대신들은 후회하고 왕에게 ‘차사국 땅은 기름지고 우리 땅과 가까우므로 언제 침략을 당할지 모를 일이므로 이 위기국면을 벗어나려면 승리감에 도취해 군기가 해이해진 적의 허점을 노려 기습공격을 감행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고 진언했다.
이에 개노국 왕은 이를 받아들여 즉시 기습공격을 감행해 점령군을 포위하고 곤경에 빠뜨렸다.
위기에 처한 정길은 즉시 선제에게 구원요청의 파발마를 보냈으나 구원병을 즉시 파병하려는 선제에게 재상은 ‘교만한 군대가 그 위세를 뽐내는 것은 교병(驕兵)이며 이런 교병은 필패(必敗)라고 했다’며 극구 만류했다.
이에 깊이 깨달은 선제는 자신도 교만했음을 뉘우치고 즉시 증병계획을 취소시켰다고 한다.
한서(漢書) 위상전(魏相傳)에도 같은 뜻으로 병교자멸(兵驕者滅) 즉 교만한 자는 멸한다고 적혀 있다.
한(漢)나라 선제(宣帝) 때 흉노가 침입했으나 한나라 군대는 이를 물리칠 수가 없었다.
선제는 장군 조충국과 상의해 흉노가 약해진 틈을 타서 출병해 그들의 요지를 격파해 다시는 서역(西域)을 어지럽히지 못하도록 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승상인 위상(魏相)은 ‘난국을 구하고 폭군을 죽이는 싸움을 의병(義兵)이라 하며 이런 싸움을 하면 천하의 임금이 될 수 있으며 적이 도전해 옴으로써 부득이 싸우게 되는 것을 응병(應兵)이라 하고 사소한 일로 다투어 노여움을 참지 못하고 싸우는 것을 분병(忿兵)이라 하며 타인의 토지나 재산을 탐내어 싸우는 것을 탐병(貪兵)이라 하는데 이렇게 되면 나라가 문란해 지며 자기 나라의 큰 힘을 믿고 백성이 많음을 자랑해 적에게 위세를 보이기 위한 싸움을 교병(驕兵)이라 하는데 이런 싸움에선 나라가 망하게 되는데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길은 단순한 인사(人事)일 뿐 아니라 천도(天道)’라고 말했다.
오늘의 한자
驕 : 교만할 교, 兵 : 군사 병, 必 : 반드시 필, 敗 : 패할 패
편집국 편집장
2018-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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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문화제 5년만의 새로운 웅비 ‘기지개’
편집국 편집장
2018-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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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맹상제(寬猛相濟)
너그러움과 엄격함이 조화를 이루어 치우침이 없이 원만하다는 뜻의 관맹상제(寬猛相濟)는 정치에 통용되는 말이다.
다시 말해 정치란 너그러움을 먼저 베풀고 다음에 엄격함을 뒤따르도록 해야 효과가 높다는 경험론으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서 볼 수 있다.
춘추시대 정(鄭)나라의 재상(宰相) 공손교(公損僑)는 자(字)가 자산(子産)으로 개혁파 정치가 였다.
그는 집권 10여년간 근검을 강조하고 사치를 반대했으며 토지제도와 군신제도를 고치는 한편 법을 통해 특권을 제한하고 정치 기강을 바로 잡았다.
그 결과 작고 보잘 것 없던 정나라는 국력이 크게 신장했고 국위도 선양됐는데 자산이 행한 통치술이 바로 관맹상제(寬猛相濟)였다.
자산이 병들어 죽게 되자 그는 후임자로 내정된 자태숙(子太叔)을 불러 통치술을 강의하면서 덕이 있는 자만이 백성을 따르게 할 수 있으며 그 다음은 엄격함으로 대하는 것이 상책이고 불이 뜨거우면 사람들은 이를 두려워함으로 불에 타 죽는 사람은 드물다.
그러나 물이란 약해 보이므로 사람들은 이를 업신여기다 물에 빠져 죽기 쉬운데 곧 너그럽게 다스리기란 어려운 일이나 한번 힘을 발휘하면 오래 간다고 말했다.
불은 엄격함으로 물을 너그러움으로 비유했다.
지나치게 엄격하면 백성들이 두려워하고 지나치게 너그러우면 게을러지기 쉽다.
그러나 우선은 너그러워야 하고 그 다음에 엄해야 한다.
너그러움은 엄격함에 비해 훨씬 장악력이 떨어지지만 효과는 장기간에 걸쳐 나타난다.
그 시대의 인물인 노나라의 공자는 이 말을 듣고 '훌륭하다 정치가 너그러우면 백성이 게을러지는데 게을러지면 엄격함으로 바로 잡고 엄격하면 백성들이 잔인해지는 데 잔인해지면 너그러움을 베풀고 이렇게 너그러움과 엄격함이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정치’라며 감탄했다.
우리나라의 정치는 전통적으로 집권 초기엔 지나칠 정도의 엄격함으로 시작했다가 후에는 관대함을 넘어서서 흐지부지 끝나는 경향이 농후하다.
즉 맹관(猛寬)의 정치라고 할까.
고전(古典)은 치국의 도리를 관맹(寬猛)으로 가르치고 있는데도 말이다.
오늘의 한자
寬 : 너그러울 관, 猛 : 사나울 맹, 相 : 서로 상, 濟 : 이룰 제
편집국 편집장
2018-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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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굉지락(曲肱之樂)
팔을 베개 삼아 잠을 자는 속에 있는 즐거움이라는 뜻으로 가난에 만족해 그 속에서 즐거움을 찾는 간소한 생활을 비유한 곡굉지락(曲肱之樂)은 논어(論語) 술이편(述而篇)에서 볼 수 있다.
논어(論語)에 보면 공자(孔子)가 ‘부자가 될 수 있다면 마부 노릇도 마다하지 않겠다’ 해 그도 부귀에 대한 집착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부귀를 맹목적으로 추구한 것은 아니었는데 ‘부귀는 누구나 원하는 것이지만 부정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라면 가지지 말 것이며 빈천(貧賤)은 누구나 싫어하지만 정당한 것이라면 피하지 말 것’이라고 했다.
요컨대 부귀는 정당한 방법으로 추구해야 할 것임을 강조한 것으로 부귀를 얻고자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고 나아가서 높은 자리에 올라 남을 다스리고 이름을 날릴 수 있다면 인생 최대의 즐거움일 것이다.
이러한 소유욕(所有欲)이 인간의 기본적 본능이며 정당한 소유욕이야말로 인류나 개인의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인간이 얻으려는 성공이나 부귀에는 끝이 없고 한이 없으며 어느 정도에서 만족할 것인가 하고 자제(自制)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대성(大成)하고도 흡족해하지 못한다면 소성(小成)하고도 만족해하는 것만 못하며 범인(凡人)으로서는 보잘것없는 성취(成就)에서도 그것이 가난한 삶일지라도 즐거움이 있는 법이다.
그래서 술이편(述而篇)에서 공자는 ‘나물 밥 먹고 물 마시고(飯疏食飮水) 팔을 굽혀 베개 삼아도(曲肱而枕之) 즐거움이 그 속에 있나니(樂亦在其中) 옳지 못한 부귀는(不義而富且貴) 나에게 한낱 뜬구름과 같다(於我如浮雲)’고 했다.
이 글에서 곡굉지락과 곡굉이침지라는 말을 찾아서 사자성어(四字成語)로 쓰고 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패배자(敗北者)의 넋두리라고 할 수도 있으나 가난하지만 부끄럼 없는 생활에서 느끼는 즐거움이 훨씬 값지다고 할 것이다.
아무려면 고대광실(高臺廣室)에서 호위호식하는 것보다 나을리 없겠지만 말이다.
오늘의 한자
曲 : 굽을 곡, 肱 : 팔뚝 굉, 之 : 어조사 지, 樂 : 즐거울 락
편집국 편집장
2018-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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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시향, 꽃보다 아름다운 챔버 뮤직 속으로
편집국 편집장
2018-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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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침무우(高枕無憂)
높은 베개를 베고 근심 없이 지낸다는 뜻으로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음을 비유한 고침무우(高枕無憂)는 전국책(戰國策) 제책(齊策)에서 볼 수 있다.
풍환(馮驩)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제(齊) 나라 맹상군(孟嘗君)의 식객(食客)이었다.
당시(當時) 맹상군(孟嘗君)은 3천 식객(食客)을 부양(扶養)하기 위해 현재의 산동성 동남 지방인 설(薛) 지방(地方)에서 돈 놀이하고 있었는데 채무자(債務者)들이 빚 갚을 생각을 하지 않자 풍환(馮驩)이 빚을 받아오겠다며 자청해 나섰다.
그러나 그는 소를 잡고 잔치를 벌여 채무자(債務者)들을 배불리 먹인 다음 계약서(契約書)를 모조리 불태우고 돌아와 ‘대인 집에 없는 의(義)를 사왔다’며 있는 그대로를 설명하자 맹상군은 울화가 치밀었지만 차마 화를 내지 못했다.
후(後)에 맹상군이 상국(相國)의 지위(地位)를 박탈(剝奪)당하고 설(薛)에 잠시 머무르게 됐는데 주민들의 환영(歡迎)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 때 풍환은 ‘교활(狡猾)한 토끼는 구멍을 세개나 뚫는데(狡兎三窟) 지금 경(卿)은 한 개의 굴을 뚫었을 뿐이므로 아직 고침무우(高枕無憂)하기는 이르니 나머지 두개의 굴도 뚫어드리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맹상군을 위해 양혜왕(梁惠王)을 설득 양혜왕이 금은보화를 준비해 세 번이나 맹상군을 불렀지만 그 때마다 풍환은 응하지 말 것을 은밀히 권했다.
이 사실을 안 제왕은 그제서야 맹상군의 진가를 알아차리고는 그를 상국 지위에 부직시켜 주어 두 번째 굴이 완성됐다.
후에 풍환은 다시 맹상군을 시켜 설에 종묘를 짓게 해 설의 안전을 도모하도록 했는데 종묘가 완성되자 풍환은 ‘이제 세 개의 굴이 모두 완성된 것으로 경께서는 비로소 베개를 높이 베고 즐기실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중국의 인물 중 전국 4공자로 호칭되는 인물들이 있는데 전국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고 걸출했던 왕족 중의 한사람으로 흔히 제 나라의 맹상군, 조 나라의 평원군, 위 나라의 신릉군, 초 나라의 춘신군을 전국 4공자라 부르며 이들은 대개 수 천명이 넘는 식객을 거느렸다 하며 이 식객들로부터 갖가지 술수와 지략 사건들이 엮어져 나왔다.
제(齊)의 맹상군(孟嘗君)의 이름은 전문(田文)이며 그의 부친은 전영으로 제 나라 위왕(威王)의 아들로 재상을 지냈다.
전영에게는 40여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전영의 첩 하나가 5월 5일에 아들을 낳았고 그 날 태어난 아이는 키가 지게문 높이까지 자라면 부모에게 해를 준다해 전영이 내다 버리라고 했으나 첩은 몰래 키웠다.
후에 이를 안 전영이 첩을 힐책하자 어린 문은 ‘사람의 운명은 하늘로부터 받느냐 아니면 문지방으로부터 받는냐’고 묻고는 문지방 문으로부터 받는다면 그 문을 높이면 될게 아니냐며 따질 정도로 영리했다.
후에 전영은 문을 후계자로 삼고 전영이 죽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설 땅의 영주가 되니 이 사람이 맹상군이다.
맹상군이 설(薛)땅에 있으면서 가산을 기울여 빈객들을 정성껏 대우하자 천하의 인물들이 다 모여들어 빈객의 수가 수천에 이르고 맹상군의 명성도 천하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맹상군이 현명하다는 소문을 들은 진(秦) 나라 소양왕(昭襄王)은 제 나라에 사신을 보내 맹상군을 진으로 초청했다.
맹상군은 식객을 인솔하고 진 나라로 들어가 진왕을 만났고 진왕은 즉시 맹상군을 재상으로 삼으려 했으나 주위 신하들이 반대해 그를 죽이려 했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맹상군은 진 왕이 총애하는 첩에게 사람을 보내 풀어줄 것을 요청하자 첩은 맹상군이 진 왕에게 바친 여우 겨드랑이의 힌 털로 만든 호백구(狐白求+衣)를 원했다.
호백구는 진품으로 하나밖에 없어 맹상군이 고민하자 식객 중의 하나가 개 흉내를 내어 창고속의 호백구를 훔쳐 돌아왔다.
호백구를 첩에게 바쳐 간신히 풀려나와 함곡관에 도착했을 때 진 왕은 맹상군을 풀어준 것을 후회하고 그를 뒤 쫒게 했으며 첫 닭이 울어야 성문을 열게 돼 있어 닭 울음소리를 잘 내는 식객의 기지로 성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그 후 빈객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맹상군을 따르게 됐다.
조(趙)의 평원군(平原君) 이름은 조승(趙勝)으로 조 나라 여러 공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조 나라 혜문왕과 효성왕의 재상으로 있었는데 세 차례나 재상자리를 떠났다가 세 차례 다시 재상에 올랐다.
평원군은 첩중의 하나가 지나가는 절름발이를 보고 비웃었다하여 첩의 목을 베라는 절름발이의 청원을 들어준 후로 그의 휘하에 수천 명의 선비가 모여들었다.
진 나라가 조 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하자 조왕은 초에 원군을 청하기 위해 평원군을 사신으로 보내기로 했는데 평원군은 출발 전 지용을 겸비한 19명을 선발했으나 나머지 한 사람을 고르지 못했다.
문하 중에 모수라는 사람이 나섰는데 평원군은 그가 누구인지 몰라 물었더니 3년간이나 식객으로 있었다하여 평원군은 ‘대체로 현명한 선비는 주머니속의 송곳과 같아 금새 밖으로 나오는 마련’이라 하니 모수가 ‘오늘 저를 주머니 속에 넣어주시길 바라며 만일 일찍 주머니 속에 있게 했더라면 송곳의 자루까지 나왔을 것’이라 말하며 끼어 줄 것을 간청해 20명을 채워 진 나라로 동행케 했다.
진 나라로 간 평원군은 모수의 기지로 진왕과 담판하여 조초 동맹을 맺는 성과를 가지고 돌아온 후 모수를 상객으로 모셨는데 그래서 낭주지추(囊中之錐)와 모수자천(毛遂自薦)이란 고사가 나왔다.
사마천은 평원군을 혼탁한 세상에서 얻기 드문 훌륭한 공자였으나 나라를 다스리는 큰 이치를 알지는 못했다고 평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그릇된 말에 빠져 장평의 군사 40여 만명을 산채로 매장케 하고 한단을 거의 멸망시킬 뻔 했던 장편전투를 두고 한 말이다.
위(魏)의 신릉군(信陵君)의 이름은 무기(無忌)이며 위 나라 소왕의 막내아들로 안회왕의 배다른 동생으로 신릉군의 누이가 평원군에게 시집을 가 조 나라 평원군과는 처남 매부지간이다.
전국시대 사공자 중 가장 어질고 능력 있는 선비로서 빼어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으며 식객은 누구를 막론하고 겸손하게 예를 갖추어 대해 사방에서 식객들이 몰려와 3천명에 달했다.
위 나라에 숨어사는 후영이라는 선비가 있었는데 그는 가난해 대량성의 이문을 지키는 문지기였는데 신릉군이 선물을 보내 모시려 했으나 후영은 받질 않았다.
하루는 연회를 열어 빈객이 많이 모이게 한 후 몸소 후생을 찾아가 마차 옆에 앉게 하니 후생은 사양하지 않고 신릉군은 더욱 예를 갖추었고 오는 중간에 후생이 마차를 기다리게 하고 푸줏간에 있는 친구와 장시간 얘기를 주고 받아도 신릉군은 낯빛이 변하지 않고 공손하게 기다렸다.
후생은 술자리에서 공자에게 ‘오늘 저도 공자를 위해 일을 할 만큼 했습니다. 저는 한낱 문지기로서 공자께서 손수 수레를 끌고 와 저를 예를 갖춰 맞이해 주셨고 일부러 공자의 수레를 오랫동안 시장 한 가운데 세워두게 해 공자의 눈치를 살폈더니 공자께서는 더욱 더 공손했으며 시장 사람들은 저를 소인이라고 하고 공자를 덕행이 있으면서 선비에게 몸을 낮추는 분이라고 했을 것’이라 말했다.
진 나라 소왕이 조 나라 군대를 장평에서 깨치고 다시 군사를 몰아 조 나라 수도 한단을 포위하자 조는 각국에 원군을 청했다.
먼저 신릉군과 사돈국인 위에게 청해 위왕이 장군 진비를 시켜 군사 10만을 이끌고 조를 지원하라 했으나 진왕이 위협해 위왕 군사가 관망하고 있을 때 신릉군은 빈객들을 이끌고 후생의 기지로 장군 진비의 첩을 이용해 부절을 훔쳐내어 조 나라 군대를 지휘해 진 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물러나게 했다.
위왕은 신릉군이 병부를 훔쳐 왕명이라 속이고 군사를 지휘한 것을 알고 화를 내 신릉군은 조 나라에서 10년을 머물었고 진 나라는 신릉군이 조 나라에 있다는 것을 알고 위를 공격해 위왕은 사자를 보내 신릉군을 돌아오도록 했다.
신릉군은 돌아와 위, 초, 연, 한, 조의 5국 연합군을 이끌고 함곡관에서 진 나라 군대를 무찔러 그 위세를 천하에 떨쳤다.
당시 제후의 빈객들이 앞 다투어 공자에게 병법을 올려 공자가 이를 이름을 붙였는데 오늘날 전하는 위공자병법(魏公子兵法)이다.
진 나라 왕은 신릉군이 죽인 진비의 옛 빈객을 찾아내 신릉군을 위왕에게 모함토록 하자 위왕도 신릉군 대신에 다른 사람을 장군으로 삼았고 이에 신릉군은 빈객들과 밤낮으로 술로 4년간 보내다가 결국 술 중독으로 죽고 말았다.
진 나라는 신릉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위를 공격해 20개 성을 함락시켰는데 사마천은 신릉군의 명성이 제후들 사이에서 으뜸이었던 것이 결코 헛소문만은 아니었다며 이상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초(楚)의 춘신군(春申君)은 성이 황이고 이름이 헐(歇)이며 여러 나라를 두루 다녀 견문이 많고 변설에 뛰어났으며 국력이 쇠퇴해졌을 때 진 나라 소왕을 설득시켜 곤경에 빠진 초 나라를 도와주도록 했다.
춘신군은 진 나라에 태자 완(完)과 함께 불모로 가 있었는데 초 나라 왕이 병들자 태자와 가까운 진 재상 범수를 설득하고 태자를 변장시켜 태자를 진에서 빠져나가게 한 후 자신은 진왕에게 자수해 처벌을 요청했으나 범수의 진언으로 초 나라로 돌아가게 했다.
초 나라 경양왕이 죽고 태자 완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고열왕으로 왕은 황헐을 재상에 임명하고 춘신군에 봉했다.
진 나라가 조 나라 수도를 포위하자 조는 초에게 구원을 청해 춘신군으로 하여금 그들을 구하게 했다.
춘신군이 재상이 된지 14년 되던 해에 진은 장양왕이 왕위에 올라 여불위를 재상으로 삼아 동주(東周)를 차지하고 계속해서 주변국들을 위협했다.
제후들이 합종해 초 나라 왕이 합종의 맹주가 되고 춘신군이 연합군을 이끌고 진 나라를 공격했으나 그만 싸움에 패해 달아난 일로 왕(고열왕)과 사이가 벌어지고 말았다.
초 나라 고열왕은 후계가 없어 춘신군이 걱정하자 조 나라 이원(李園)이란 자가 누이를 춘신군에게 바쳐 잉태케 한 후에 누이와 일을 꾸며 춘신군이 왕에게 이원 누이를 추천토록 했다.
몇 달 후 그녀가 아들을 낳아 태자가 되고 이원 누이는 왕후가 되어 이원이 정사에 관여하게 되자 이원은 춘신군과의 비밀이 새어나갈까 두려워 춘신군을 죽이려 하자 이를 눈치 챈 신하 주영이란 자가 춘신군에게 이원을 죽일 것을 간언했으나 춘신군은 자신이 이원을 그토록 잘 대접해 주었는데 그럴리가 없다며 받아주질 않았다.
결국 고열왕이 죽어 춘신군이 궁안으로 들어서자 미리 숨어있던 이원의 병사들이 춘신군의 목을 베고 그 집안사람들을 모조리 죽였다.
춘신군의 총애를 받아 아이를 가진 뒤 초 나라 왕에게 바쳐졌던 이원의 누이동생이 낳은 아들이 왕위에 올라 유왕(幽王)이 됐다.
이 무렵 진 나라는 여불위가 쫒겨나고 노예의 반란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고 삼족이 몰살되는 변이 있었다.
사마천은 춘신군에 대해 춘신군이 진왕을 설득하고 몸을 던져 초 나라 태자를 돌아오게 한 것은 얼마나 뛰어난 지혜인가?
그러나 이원에게 당한 것은 늙어서 사리판단에 어두운 탓이며 세인의 말에 마땅히 결단을 내려야할 때에 결단을 못 내리면 도리어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이는 춘신군을 두고 한 말인가?
오늘의 한자
高 : 높을 고, 枕 : 베개 침, 無 : 없을 무, 憂 :근심 우
편집국 편집장
2018-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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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문대, 지역주민들에게 예술의전당 명품공연 상영
[굿타임] = 이강부 기자 = 선문대학교는 14일부터 오는 5월 23일까지 본교 원화관 아트홀에서 예술의전당 공연을 영상으로 무료감상할 수 있는 선문수요예술무대를 개최한다.
선문수요예술무대는 3월부터 5월까지 오페라와 연극 등으로 편성돼 3월 15일 마술피리(오페라), 28일 디토 파라디소(클래식), 4월 11일 메피스토(연극), 4월 25일 윤동주, 달을 쏘다(창작가무극), 5월 9일 증발(현대무용), 5월 23일 보물섬(연극)을 감상할 수 있다.
이니티움교양대학 교양교육연구센터는 선문수요예술무대를 위해 예술의전당과 상호협약을 맺어 마술피리 등 초고화질 공연 영상 6편을 본교 원화관 아트홀에서 무료로 상영하며 학생이나 지역주민 모두가 별도의 신청 없이 참석이 가능하다.
김경미 학장은 “지역적 제한으로 예술 공연을 접할 기회가 적은 학생들과 지역주민들에게 풍요로운 문화체험을 제공하고자 기획했으며 영화관보다 규모가 큰 아트홀에서 실제 공연을 보는 듯 생생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편집국 편집장
2018-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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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원조 백제 즐기고 음미하는 제64회 백제문화제
[굿타임] = 이강부 기자 = 제64회 백제문화제는 백제의 춤과 노래에 대한 다각적인 조명을 통해 한류원조로서의 백제를 즐기면서 음미하는 축제로 개최한다.
(재)백제문화제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는 8일 백제문화단지관리사업소 회의실에서 제43차 추진위원회를 열어 오는 9월 14일부터 9월 22일까지 한류원조 백제를 즐기다란 주제와 백제의 춤과 노래란 부제로 개최하는 제64회 백제문화제 기본계획안을 심의 확정했다.
제64회 백제문화제는 마한의 전통을 전승해 독특한 음악세계를 발전시킴으로써 우리나라와 일본의 고대 음악사와 공연예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백제문화의 위상과 가치에 대한 이해를 한층 높이는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또 새롭고 다채로운 시도와 지역주민과 방문객이 적극 참여하는 수요자적 프로그램 개발 등을 통해 제64회 백제문화제가 세계인이 백제문화로 연결되는 글로컬(지역과 세계를 아우르는) 역사문화축제로 자리매김하는 계기로 삼을 계획이다.
추진위는 백제문화제 핵심 콘텐츠 개발로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서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해 올해 주제를 반영한 대표 신규 프로그램 개발과 해외교류국 초청공연, 창작공연 등을 추진한다.
공주시는 웅진판타지아의 주제성과 전달력 강화, 웅진성퍼레이드의 탄력적 운영, 대백제퍼레이드교류왕국의 위상과 품격 강화, 백제마을 고마촌의 가족 프로그램 강화, 백제역사유적지구 활용 프로그램 확대 등 대폭 보완할 예정이다.
부여군은 백제문화제 시원 프로그램인 제례와 불전의 공연 접목, 백마강 가에 있는 구드래 일원(명승 제63호)에 저잣거리 등 백제 무역항 재현, 백제 대표유물인 백제금동대향로 퍼레이드, 백제 전통놀이와 보드게임을 결합한 경연 등 다양한 변화를 시도할 예정이다.
추진위 관계자는 “제64회 백제문화제는 한류원조로서의 백제문화를 재조명하고 백제역사유적지구를 기반으로 백제의 후예들과 방문객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가는 축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편집국 편집장
2018-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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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정면 동산1리, 정월대보름 맞이 각종 행사 풍성
편집국 편집장
2018-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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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복격양(鼓腹擊壤)
고복격양(鼓腹擊壤)은 배를 두드리고 발을 구르며 흥겨워 한다는 뜻으로 백성들이 태평세월을 누린다는 뜻으로 십팔사략(十八史略) 제요편(帝堯篇)과 악부시집(樂府詩集) 격양가(擊壤歌)와 사기(史記) 오제본기편(五帝本紀篇)에서 볼 수 있다.
유가(儒家)는 성군(聖君)의 표상(表象)으로 요(堯)임금과 순(舜)임금을 꼽는데 두 임금의 치세는 아직 고증이 되지 않아 신화라고 주장하는 학자가 있으나 공자나 맹자 같은 성인이 가상이나 전설의 인물을 그토록 받들고 거론했겠느냐는 반론이 있다.
천하(天下)의 성군(聖君)으로 꼽히는 요 임금이 천하를 통치한지 50여년이 지난 어느 날 자신의 통치에 대한 백성들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평복으로 거리에 나섰는데 어느 네거리에 이르자 어린 아이들이 손을 맞잡고 요임금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입아증민(立我烝民) 우리가 이처럼 잘 살아가는 것은
막비이극(莫匪爾極) 모두가 임금님의 지극한 덕이네
불식부지(不識不知) 우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순제지칙(順帝之則) 임금님이 정하신 대로 살아가네
요 임금은 어린이들의 순진한 노랫소리에 기분이 매우 좋았고 마음이 흐뭇해진 요 임금은 어느 새 마을 끝까지 걸어갔다.
그곳에는 머리가 하얀 한 노인이 우물우물 무언가 씹으면서 손으로 배를 두드리고 발로 땅을 구르며(鼓腹擊壤)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일출이작 일입이식(日出而作 日入而息) 해가 뜨면 일하고 해가 지면 쉬네
경전이식 착정이음(耕田而食 鑿井而飮) 밭을 갈아 먹고 우물을 파서 마시니
제력하유우아제(帝力何有于我哉) 임금님의 힘이 나에게 무슨 소용인가요.
백발노인의 고복격양(鼓腹擊壤)에 요 임금은 정말 기뻤다.
백성들이 아무 불만 없이 배를 두드리고 발을 구르며 흥겨워하고 정치의 힘 따위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으니 그야말로 정치가 잘 되고 있다는 증거였으며 이 노래의 내용은 요 임금이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정치였다.
다시 말해서 요임금은 백성들이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스스로 일하고 먹고 쉬는 이른바 무위지치(無爲之治)를 바랐던 것이다.
요임금의 덕택이다, 좋은 정치라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보다 그 노인처럼 백성이 정치의 힘을 의식하지 않고 즐겁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이 이상적인 정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요임금은 자신이 지금 정치를 잘 하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도교(道敎)의 창시자 노자(老子)도 이런 정치를 두고 무위(無爲)의 치(治)라고 했으며 정치론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리고 요 임금처럼 지배자가 있는지 없는지를 모를 정도로 정치를 잘하는 지배자를 최고의 통치자로 꼽았다.
격양(擊壤)은 나무로 만든 신 모양의 양(壤)을 땅에 세워놓고 떨어진 곳에서 다른 양을 던져서 격(擊) 맞추는 놀이라는 설과 흙으로 만든 악기를 타는 일이라는 설이 있다.
오늘의 한자
鼓 : 두드릴 고, 腹 : 배 복, 擊 : 칠 격, 壤 : 부드러운흙 양
편집국 편집장
2018-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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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할머니 모십니다"
[굿타임] = 이강부 기자 = 충남도는 다음 달 16일까지 제10기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사업 참여 희망자를 모집한다.
도와 한국국학진흥원이 함께 추진하는 아름다운 이야기할머니 사업은 할머니들이 유치원과 어린이집 등 유아 교육 기관을 방문해 옛날이야기나 미담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이 사업은 100세 시대를 맞아 할머니들에게 보람 있고 품격 높은 사회 참여 기회를 제공하고 유아들에게는 이야기를 통한 올바른 인성 형성을 돕기 위해 지난해까지 이야기할머니 127명을 선발 도내 277개 유아기관에 파견해 사업을 추진해 유아 인성 함양과 여성 노령 인구 삶의 질 개선에 힘 써 왔다.
올해 신규 선발하는 이야기할머니는 만 56세부터 만 70세까지의 할머니로 유아에 대한 관심과 애정만 있다면 학력에 관계없이 누구나 지원 가능하다.
도는 응모자에 대한 서류 심사와 면접 등을 거쳐 오는 5월 최종 합격자를 발표할 계획이며 최종 합격자는 신규와 월례 교육 등 9개 과정을 수료한 후 내년부터 주2회 씩 도내 유아기관에서 이야기할머니로 활동하게 된다.
도 관계자는 “이야기할머니 사업은 미래 세대에게 한국적 정서가 담긴 이야기를 보급함으로써 민족문화 전승 기반 구축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편집국 편집장
2018-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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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디스플레이, 발달장애 아동 청소년 특별한 재능 응원
편집국 편집장
2018-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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